늦게 꺼낸 렌즈

-예류에서 다시 만난 시간

by 김희진


기억은 늘 제때 꺼내지 못한 채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나는 오래전 그 사실을 몰랐다.
처음 대만 예류를 찾았을 때가 벌써 서른여덟 해 전이다.
그곳에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지만,
정작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했다.
하얀 모래 둔덕 위로
신비한 형상을 한 사암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풍경은 마치 자연이 펼쳐놓은 조각 전시장이었다.
맑은 햇볕 아래
검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고,
그때의 바다는 지금보다 더 투명하게 느껴졌다.
바닷바람은 부드럽게 스쳐갔고,
사암의 결은 은빛처럼 반짝였다.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나는 그저 감탄하고 지나왔다.
글로 붙잡아 둘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서른여덟 해가 지난 뒤,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섰다.
이상하게도
흐릿해졌을 거라 생각했던 기억들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눈앞의 풍경보다
내 안에 남아 있던 장면들이
더 선명하게 살아났다.
여왕바위의 모습이 그랬다.
하얀 얼굴에
검은 곱슬머리를 한 듯한 형상.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다시 꺼내지는 것이라는 것을.
마치 눈으로 찍어 둔 한 장의 사진처럼.
나는 그때 비로소
내 안의 렌즈를 꺼내 들었다.
빛과 색,
바람의 결까지 담고 있던 시간들을
하나씩 꺼내어
말로 닦고,
문장으로 이어 붙였다.
그리고 그 기억을
시로 현상했다.
늦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꺼내어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나는 오늘
그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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