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다

감정 용량

by 여슬

영화 <만약에 우리>에서 주인공들의 재회 장면은 흑백으로 흘러간다. 구교환 배우가 헤어진 연인에게 다시 질문을 시작하는 순간, J는 그 흑백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컬러를 걷어낸 영화관 화면은 감정을 덜어내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더 정직해지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J는 극장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문학과 영화에 정해진 답이 없듯, 그 흑백의 장면 역시 하나의 해석으로만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J는 직감했다. 흑백의 화면은 J의 발걸음마다 묻어나 짙은 자국처럼 천천히 따라왔다.


글쓰기 스튜디오를 열면서 J의 이름으로 된 대출 서류는 하나 더 늘었지만, 퇴근 후 TV 앞에 앉아 하루를 흘려보내는 일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이제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편의점 옆에 글을 쓰는 작은 공방이 있고, 그곳에서 J는 테라까지 늘려두었던 감정의 용량을 기가 단위로 줄여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은 덜 여문 마음과 불안정한 현실, 평서문보다는 의문문으로 가득한 나날이지만 이 작은 글쓰기 스튜디오에서만큼은 J의 감정을 하나씩 정리해 보기로 했다.


답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은 문장처럼, 지금의 삶도 그 상태로 잠시 두기로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