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희주 Apr 03. 2018

타인의 행복에 관심 갖는 사람

     


그 씨앗이 언제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른다. 타인의 생각, 시각은 의외로 쉽게 전염되는 법이니까. 말의 생명력은 꽤 강인해서 마른 듯 마른 듯 보여도 비가 오고 햇빛이 비치는 적당한 환경이 마련되면 다시 무섭게 가지를 뻗고 잎을 틔우는 법이니까. 누군가와 마주 앉은 테이블 위를 떠돌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무심코 읽은 책 위를 배회하다, 지쳐 잠든 귀가길 버스 안에서 흔들리다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는지 모른다. 이제 와 씨앗의 출처를 알 순 없지만 그것이 내 안에서 빼꼼히 싹을 내민 시점은 제법 선명하게 기억한다.


몇 해 전, 1년간 주말농장을 한 적이 있다. 몇 년 후 귀농을 계획한 선배들이 ‘농사를 한번 지어보라’며 가꾸던 밭 한쪽을 떼어주었다. 작물을 키우는 데 소질은 없었지만 관심은 많았던 나는 덥석 선배들이 내어준 땅을 차지했다. 선배들은 기술과 요령은 없으면서 마음만 앞세우는 초짜를 위해 딱 씨앗만 뿌려 키울 수 있게 모든 준비를 갖추어주었고, 의욕은 넘치지만 혼자 할 자신은 없었던 나는 부모님을 끌어들여 주말이면 집에서 차를 타고 10분 정도 걸리는 밭으로 향했다.

콕 콕 완두콩을 심고, 씨감자를 묻고, 상추씨를 뿌리고, 고추 모종을 세웠다. 하나둘 새로운 작물을 심고 묻고 뿌리고 세운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에게 세상은 그 전과는 조금 다른 빛을 띤, 똑같지만 미묘하게 달라 보이는 무엇이 되어 있었다. 10시 반의 햇살에서 4시경의 햇살로 넘어온 느낌. 오른쪽으로 5도쯤 틀어 앉은 느낌.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 다시 걸어가는 느낌. 계속 보아왔던 풍경이 낯설고 생경하게 다가오는 그런 느낌.

눅눅하고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워 짜증부터 났던 비를 보며 ‘우리 애들 목 좀 축이겠네. 얼마나 신이 날까. 더 와라, 더 와’ 반가워하는 내가 있었고, 너무 따가워 밖에 나갈 엄두조차 못 내게 하던 햇빛을 보며 ‘우리 애들 이 빛 받고 쑥쑥 자라겠네’ 고마워하는 내가 있었다. 비, 바람, 해, 달, 구름, 눈…. 자연의 변화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는 내가 있었다. 집에 작은 무당벌레만 날아 들어와도 기겁을 하던 나는 사라지고 손을 휘저으며 훠이훠이 “저리 가서 놀아라” 하는 내가 있었다.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방울토마토를 따러 간 참이었다. 손만 뻗으면 토마토를 딸 수 있는 거리. 하지만 내 손은 몸통 옆에 꼭 붙어 움직일 줄 몰랐다. 토마토로 가는 그 길 사이에 손으로 훠이훠이 쫓아내기엔 너무 큰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지어놓고는 떡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토마토를 지키는 보디가드처럼.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은 전설의 골키퍼처럼. 손을 뻗자니 거미가 너무 무섭고, 우리 집에 나타났다면 책을 던졌든 에프킬라를 뿌렸든 어떤 방법으로든 죽였을 거미를 거미가 사는 게 당연한 이 밭에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미줄을 끊자니 다다다다 거미가 내 손으로 달려들 것만 같고, 토마토를 따지 말까 싶지만 그러면 익을 대로 익은 토마토는 매달린 채 썩어갈 게 분명하고…. 거미를 노려보며 이런저런 고민에 빠진 사이 “안 따고 뭐 해?” 아빠가 불쑥 다가와 토마토로 손을 뻗었다. “앗, 거미….”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아빠는 거미줄을 걷어내 버리고는 “엄청 달렸네” 신이 나서 토마토를 하나둘 따 나갔다.

아빠 옆에서 그 거미는 어디로 갔을까 두리번거리며 조심조심 토마토를 따는데 문득 ‘경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우리는 왜, 아니 나는 왜 이곳은 거미가 살아도 되는 곳, 우리 집은 거미가 살면 안 되는 곳으로 경계 지었을까? 밭에서 거미도 살고 나도 사는 것처럼 우리 집에서 나도 살고 거미도 살면 안 되는 것일까? 내가 싫다는 이유로, 내가 무섭다는 이유로 하루하루 주어진 생명 활동을 열심히 하는 거미를 함부로 죽일 권리가 과연 내게 있는 걸까?

허리를 펴고 길 건너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았다. 마루가 있는, 흙과 가까운 시골집에 산다면 거미든 무당벌레든, 다른 많은 생명체가 집 안으로 찾아드는 것을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구획을 짓고 청결을 유지하고 소독약을 뿌려서 우리 가족 이외의 생명체는 좀처럼 들어갈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든 저 아파트는 과연 자연스러운 곳이라 할 수 있을까? 문을 닫고 들어가면 세상과 차단되는 닫힌 공간에 살면서 우리의 생각도, 마음의 문도 서서히 닫혀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서 톡 솟아나 불어오는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렸다.


본격적으로 교정을 업으로 삼은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한 달에 얼마나 벌었는지 궁금해 계산기를 두드렸다. 앞으로 들어올 돈은 우선 빼고 6개월 동안 통장에 찍힌 금액만 모두 합해 6으로 나누었더니…. 참담했다. 100만 원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가 단호하게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똑같은 물음만 곱씹으며 망연자실 눈앞의 숫자를, 눈앞의 현실을 부정했다. 이건 아니야. 숫자를 지우고 몇 분 전에 입력했던 금액을 다시 꾹꾹 눌렀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앞으로 들어올 돈까지 합해보았으나 그래봤자 힘껏 손을 뻗어야 겨우 100만 원에 닿을까 말까 한 금액이었다.

나를 혼내는 데 제법 소질이 있는 나는 우선 나부터 의심했다. 원고 보는 속도가 너무 느린가? 일하기 싫다고 세월아 내월아 하면서 미적거렸던 거 아냐? 지난 6개월간의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억울했다. 나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원고 보는 속도가 몹시 빠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는 봐서 넘긴 것 같았다. 그때는 글 쓰는 시간을 빼놓지도 않았으니 일만 하면서 보냈던 게 틀림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면 그럼 잘못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내가 만약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면,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감당하면서 살아야 했다면 도저히 내 삶을 꾸려갈 수 없는 금액이었다. 한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해도 돈을 모으기는커녕 생계를 해결하는 것조차 힘들다면 그것은 시스템에,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그 시스템은, 사회는 뭔가가 잘못된 것 아닐까. 그런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요즘 평균 교정료는 원고지 1매당 1교 700원, 2교 500원, 3교 300원을 받는다. 1천 매짜리 원고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국판 판형으로 300쪽이 조금 넘게 나온다. 이 말인즉 책 한 권을 세 번 읽고 교정하면 12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은 호흡이 긴 문장, 호흡이 긴 책을 어려워하는 독자가 많아 갈수록 문장도, 책의 길이도 짧아지는 추세다. 원고지 400매 책, 800매 책이 흔하다. 400매 책을 3교까지 보면 교정자가 받는 비용은 48만 원이다(여기서 세금을 떼면 더 줄어들지만). 그리고 보통 이 돈은 책이 출간된 후에나 받을 수 있다. 출판사 사정에 따라 책이 빨리 출간될 수도, 늦게 출간될 수도 있다. 처음 1교를 시작한 원고가 6개월 뒤 출간되기도 하고, 내가 3교까지 끝낸 원고가 3개월 뒤에 출간되기도 한다. 그러면 교정자의 수입은 6개월에 120, 두 달에 48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원고지 1매당 1교 700원, 2교 500원, 3교 300원인 교정료는 내가 출판사에 들어간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물가가 치솟고, 연봉이 쥐꼬리만큼 오르는 와중에도 늘 제자리걸음인 분야는 어디든 있는 모양이고, 을의 을 정도 되는 교정자의 자리 역시 제자리를 지켜왔다.


통장에, 계산기에 찍힌 숫자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교정자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나는 무엇일까. 나는 그들의 동료일까 아닐까. 그들의 경계 안에 들어선 사람일까 경계 밖을 떠도는 사람일까.

때때로 나는 내가 마치 작은 거미 혹은 무당벌레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우뚝 솟은 높고 청결한 저 건물에는 내가 살 만한 공간이 조금도 없는 것만 같다. 내가 여기서 살아도 되나, 집 지어도 되나 싶어 살며시 거미줄을 치면 어김없이 책이나 에프킬라가 날아오고, 창이 열려 있어 무심코 날아 들어가면 역시나 어김없이 매몰차게 쫓겨난다. 그곳은 그들이 사는 곳, 이곳은 내가 사는 곳. 그곳은 내가 살아선 안 되는 곳, 이곳은 내가 살아도 되는 곳. 세상이 그렇게 경계를 나누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경계는 날이 갈수록 높고 견고해지는 것만 같다.

피곤한 몸을 누일 집이 있고, 가족을 태우고 여행할 작은 차가 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평범하달 수 있는 삶이, 남들만큼 사는 삶이 참 어렵게 느껴진다. 하루하루 나에게 주어진 생명 활동을 열심히 하며 사는 것 같은데도 늘 벽에 부딪히며 사는 듯한, 늘 쫓겨 다니며 사는 듯한, 늘 밖을 서성이며 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누가, 왜, 무슨 이유로, 무슨 권리로 서로를 쫓고, 쫓아내는 걸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요즘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성원의 행복에 관심을 가진 곳’이 진정한 공동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 당신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는지,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어떤 일이 당신을 힘들게 했는지 들여다보는 곳.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 살아남고자 하는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곳. 그 자체로 존중하는 곳. 누군가를 밑거름 삼아 누군가를 웃자라게 만들지 않는 곳. 그런 의미에서 내가 몸담았거나 몸담고 있는 사회는, 직장은, 학교는, 때때로 가정은 공동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도, 직장도, 학교도, 가정도 나와 마찬가지 아닐런지.


내 몸속 어딘가에 묻혀 있던 씨앗이 주말농장을 꾸렸던 밭에서 싹을 틔우더니 조금씩조금씩 자라나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와서 구성원의 행복에 관심을 가진 곳, ‘같이 사는 법’을 고민하는 곳을 꿈꾸는 꽃봉오리를 맺었다. 꿈만 꾸다 봉오리째 툭 떨어져버리지 않도록 이 꿈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나는 우선 내 주변 사람들의 웃음에, 눈물에, 한숨에 관심을 가져야겠다. 그들의 눈을, 등을, 걸음을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야겠다. 여전히 미숙한 나이지만 그렇게 10시 반의 햇살에서 4시경의 햇살로 넘어오면, 그렇게 옆으로 5도쯤 틀어 앉으면, 그렇게 오던 길을 되돌아 걸어가면 조금은 다른 세상을, 같지만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을의 을 정도 되는 삶도 조금은 살 만한 세상이 오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교정이나 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