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서울원자력병원앞 앵두맛
2장 아버지와 마지막 가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아버지만 쫓아다녔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일할 때도 데리고 가시고, 사업차 다방에 가실 때도 나를 업고 다니셨다. 아빠 사업자들은 모두 나를 알았고, 나는 동네 다방에서 꽤 유명했다. 여섯 살 꼬마, 다방 아주머니들은 내가 아빠와 들어가면 '오! 아기 왔구나, 오늘도 구기자차 맞지?' 하며 내가 좋아하는 구기자차를 내오셨고 나는 그것을 마시며 아빠와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 돌보며 사업도 함께 하시다가 본인 몸에 암이 자라는 것도 모르셨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7개월쯤 되었을 때 암 진단을 받으셨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온갖 병원을 또 전전하셨다. 햇살이 맑고 좋은 날로 기억하는데, 나를 데리고 경기도 쪽 어디인지 구비구비 들어간 산골마을의 집으로 같이 갔다. 마당에는 닭이 뛰어다녔고, 영문도 모르는 나는 닭과 함께 뛰어다녔다. 아버지는 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한참 뒤에 나오신 아버지의 얼굴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절망의 얼굴이었고,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상해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바다를 갔고, 아주 큰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는 중간에 가림막이 있어 넘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어떤 분이 '아이고 꼬마 이쁘기도 해라. 이름이 뭐야?'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아버지의 얼굴이 슬픔으로 가득 찬 걸 여섯 살 내가 느꼈다.
그 후 아버지는 병세가 심해지시고 서울 정동의 원자력병원에 입원하셨고, 나 또한 매일 아버지 곁에 있었다. 누웠을 때 병실의 형광등이 굉장히 많았으나 나의 기억엔 그 빛이 왠지 무채색으로 느껴졌다. 병원에서 나의 일과는 아침이 되면 아버지가 천 원을 주셨고, 1976년 당시 천 원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병원 밖을 나가면 노점 아주머니들이 주욱 앉아 계셨고, 매일 오는 나를 모두 반겨주셨다. '꼬마 나왔구나. 오늘 앵두는 더 맛있다, 사 먹어라.' 나는 앵두를 한 줌 사서 먹으며 오락실로 향했고, 오락을 하다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밤이 되면 어린아이가 나밖에 없었고, 나를 측은히 생각해서였을까. 간호사 언니가 밤만 되면 계단으로 나를 데려가 온갖 동요를 알려주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앉아서 배우던 그 노래가 기억난다. '숲속 작은 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서 있는데, 토끼 한 마리가 달려와 문 두드리며 하는 말~'.
아버지는 점점 더 아프셨는지, 베개 밑에 돈을 두며 몰래 강한 진통제를 맞으셨던 것 같고, 어린 나의 직감에도 아버지가 몸에 안 좋은 것을 맞는 것 같아 매일 아빠에게 소리쳤다. '아빠, 의사 선생님 오면 다 말할 거야. 자꾸 뭐를 맞는다고!' 아빠는 이 말에 슬프셨겠지. 얼마 뒤 아빠는 나에게 정말 무섭게 대하시며 집에 가라 하셨고, 나는 아빠의 처음 보는 모습에 무언가를 느끼며 삼촌과 집으로 갔고, 그 다음 날 모든 식구가 울며 슬픈 표정을 보였고 나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직감으로 느꼈고, 바로 옷장 안으로 숨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