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쏟아지는 밤길
— 환자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나는 아픈 이를 보면 일단 모든 것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무언의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이 신념은 단순히 책으로 배운 것도, 누가 내게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다.
의사이시기도 한 병원 사모님 곁에서, 그분이 환자에게 몸으로 보여주신 태도를 통해 내게 새겨진 삶의 철학이었다.
사모님은 환자가 아프다고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달려가셨다.
회의가 있든, 집안일이 있든, 그 순간에는 오직 환자만이 중심이 되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며, ‘아, 아프다는 건 그 무엇보다 먼저 챙겨야 하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분의 행동은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그 후로 나도 자연스럽게 환자 앞에서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
내가 피곤하든, 개인적인 일이 있든 중요하지 않았다.
환자의 고통이 먼저였고, 그 고통을 덜어내는 것이 곧 내 사명이 되었다.
이 무언의 책임감은 내 삶 전체를 관통해왔다.
시댁 어른들이 아플 때마다 원주에서 춘천을 오가며 약을 짓고, 혈관이 보이지 않을 때는 손가락까지 찾아 링거를 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철학 덕분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에도, 퇴근 후 지친 몸에도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환자의 아픔 앞에서는 내 피곤함보다 회복의 가능성이 먼저였다.
돌이켜보면, 이 신념이야말로 나를 지탱해 온 뿌리였다.
내 손끝에서 환자가 다시 생기를 되찾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뿌리는 언제나, 병원 사모님께서 몸으로 보여주신 그 첫 가르침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