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발음이 사랑에 가닿을 때

by heelight

〈양말 하나 신으세요〉 연재 2/3


말이 나를 떠난 자리


제주 골목 끝 한의원에서 양말을 건네던 그날, 한 환자가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왜 자꾸 누군가의 발을 먼저 봐요?”


그 질문이 저를 과거로 데려갔습니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의 파편 하나쯤은 가슴속에 박혀 있기 마련입니다.

제게 그 파편은 ‘말’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혀가 조금 짧았습니다.

남들에게는 공기처럼 쉬운 발음이 제게는 넘기 힘든 파도 같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국어 시간, 제 차례가 되어 책을 읽어야 했던 날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고 글자들은 눈앞에서 자꾸만 흐려졌습니다.


“오... 오늘은... 날씨가...”


용기를 내어 뱉은 첫 문장은 교실을 채운 웃음소리에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뭐라는 거야?”

“듣기 힘들다.”


아이들의 장난 섞인 야유는 화살처럼 날아와 어린 가슴에 그대로 꽂혔습니다.

선생님의 “조용히 해!”라는 목소리도 이미 쏟아진 웃음을 되돌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입을 닫았습니다.

말은 더 이상 제 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침묵은 저를 지키는 유일한 성벽이 되었습니다.


침묵이 가르쳐준 능력


말수가 줄어든 대신, 제게는 기이한 능력이 하나 생겼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는 힘이었습니다.


또박또박 대답하지 못하는 대신 친구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읽었고,

어머니의 잦은 한숨 뒤에 숨은 고단함을 먼저 느꼈습니다.


“괜찮다”는 말에 섞인 떨림,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할 때 흔들리던 눈동자.


말이 아닌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은 자연스럽게 한의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연의 흐름을 듣고, 몸의 맥동을 듣고, 사람의 기운을 듣는 공부.


하지만 한의사가 된 뒤에도 ‘말’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환자에게 설명을 해야 할 때면 발음은 다시 꼬였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미묘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역시 안 되는 사람인가.”

과거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되살아나던 그 무렵, 그녀를 만났습니다.


나를 대신해 말해준 사람


그녀는 한의원 리셉션에서 일하던 직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유난히 까다로운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제가 설명을 시작했을 때, 발음이 심하게 꼬였습니다.

“어... 어깨 부분이...”

말이 자꾸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녀가 자연스럽게 나섰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사람처럼.


“환자분, 원장님은 손으로 설명하시는 게 더 정확해요. 한번 누워보실래요?”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웠습니다.

누구의 부족함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말투였습니다.


환자가 나간 뒤, 제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왜 말을 그렇게 못 해요?”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제주 사투리가 심하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일할 때 무시당했던 기억.

억지로 표준어를 쓰다 ‘나답지 않다’는 감각에 더 괴로웠던 시간들.


그리고 말했습니다.

“원장님, 말의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속도가 중요한 거 아닐까요?

원장님은 환자들 마음을 누구보다 잘 들어주시잖아요.

저는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말은 제 콤플렉스를 녹이는 따뜻한 찻물 같았습니다.


상처가 서로를 알아본 순간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억지로 고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도 그랬어”라고 말하며

나란히 앉아 제주의 바람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콤플렉스는 모양만 다를 뿐

아픔의 결은 닮아 있다는 것을.


작은 섬을 짓기로 한 이유


우리는 결심했습니다.


우리처럼 마음 둘 곳 없어 외로웠던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와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섬 같은 공간을 만들자고.


완벽한 발음도,

화려한 언변도 없지만 누구보다 깊이 들어줄 준비가 된 한의원.


늦은 밤 누군가 절박하게 문을 두드린다면

그 사람을 과거의 우리 자신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불을 밝히는 곳.


그렇게 우리는 제주 골목 끝에 한의원을 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곳을 이상하다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 이상함이 오히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곳에서 약보다 먼저 마음을 건네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다음 이야기:

“여기 오면 사람 냄새가 나서 좋습니다.”

한의원을 거쳐 간 수많은 발길과,
서랍 속에 양말을 채워 넣는 부부의
밤 깊은 대화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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