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땅 하나만 파줘
그날은 오후였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제주의 골목을 아무 목적 없이 걷고 있었다.
사흘째였다.
서울에서 가져온 계획들은 이미 흐트러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흐트러짐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만들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관광객의 소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만 남아 있는 골목이었다.
낡은 간판들이 이어져 있었고 대부분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만
작고 따뜻한 불빛을 켜고 있었다.
나는 그 불빛 앞에서 잠깐 멈췄다.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날은 그 불빛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식당 안에는 오래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테이블은 낡았고, 의자는 조금 삐걱거렸고,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꾸민 흔적은 없었지만
버틴 시간은 분명해 보였다.
메뉴판을 펼치고 잠시 망설였다.
정말 맛있을까.
그때 주방에서 들려오는 칼질 소리와 물 끓는 소리가
이 집의 대답 같았다.
음식은 꾸밈없는 밥상이었다.
첫 숟갈을 뜨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주인분의 손맛이 정말 좋았다.
맛이라는 건 혀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맛은 사람의 어깨를 내려놓게 만든다.
그 집의 음식이 그랬다.
그런데 더 인상 깊었던 건
음식보다 말이었다.
주인분은 바쁜 와중에도
손님들과의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춥죠.”
“그거 말고, 이거 드세요.”
그 말들은 친절이라기보다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주인분이 혼자였다면
과연 저 말들이 나왔을까.
대화는 혼자서 만들 수 없다.
말을 건네는 사람과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이에서 온도가 생긴다.
주인분은 창밖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그 사람들 올 날인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말에는
언제나 사연이 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식당의 공기가 달라졌다.
안전화 소리, 거친 웃음,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주인분의 어깨가 아주 조금 풀리는 게 보였다.
정말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국과 밥이 빠르게 놓였고
식당은 웃음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 웃음 속에서
말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
사람들 속에 혼자 앉아,
귀를 열어두는 시간.
그날 나는 바로 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국을 거의 다 비워갈 즈음,
주인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 땅 하나만 파줘.”
순간, 식당의 시간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나 이제 살날 얼마 안 남았거든.
죽으면 거기 묻히게.”
웃음이 터졌다.
농담처럼 흘려보내기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농담 아니시죠?”
주인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병원에서 1년이라고 했어.”
그 순간,
음식 소리가 멈췄다.
말도 멈췄다.
사람들만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
“식당도 계속 열고,
너희도 계속 보고,
그러다 때 되면 가는 거지.”
누군가 울먹이며 말했다.
“너무 일찍은 안 돼요.”
주인분은 웃으며 답했다.
“그래. 천천히 파.
나도 천천히 갈 테니까.”
웃음이 다시 났다.
이번엔 눈물이 섞인 웃음이었다.
오후가 깊어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식당을 나갔다.
주인분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에 담그고,
닦고,
헹궈내고.
그 반복되는 손길 속에
앞으로 남아 있을 날들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인분이 나를 보며 물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요. 그냥…”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녁의 어둠을 뚫고
다시 그곳을 찾았다.
주인분은 나를 단번에 기억해 냈다.
“오셨어요? 이번엔 이거 먹읍시다.”
그 말은 더 이상
평범한 인사로 들리지 않았다.
내일도, 모레도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다는
삶의 약속처럼 들렸다.
식당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캄캄한 골목,
유리창 너머로 홀로 일렁이는 노란 불빛.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손맛이란 혀끝에 남는 맛이 아니라,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는 손의 온기라는 걸.
삶이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1년이라는 한계를 안고도
내일의 밥물을 맞추는 일이라는 걸.
누군가는 그렇게 오늘도,
묵묵히 식당 문을 연다.
그 문 뒤에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