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보수적인 한국시장 그리고 크로스오버 바디타입

by 힐링다방

익숙한 선택이 가장 안전했던 시장

한국의 자동차 시장은 글로벌 주요 시장과 비교하면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해치백, 웨건, 쿠페처럼 조금이라도 비주류로 분류되는 바디타입은 늘 선택지에서 밀려났고, 이 흐름은 꽤 오랜 시간 유지돼 왔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유럽에서는 소형/준중형 해치백이 시장의 중심을 이뤘고, 일본 역시 콤팩트 해치백과 왜건이 일상적인 선택지였다. 반면 한국은 중형 세단 중심의 수요 구조가 2010년대 초반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익숙한 차’가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던 시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로 위 풍경이 말해주는 보수적인 소비 성향

이런 성향은 차량 색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 신차 판매의 약 70~80%가 흰색, 검정, 회색, 실버 같은 무채색에 집중돼 있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도로 위 차들이 전부 비슷해 보인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브랜드뿐 아니라 색상, 차종까지 한정된 시장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크로스오버라는 개념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요즘은 예전만큼 자주 쓰이지 않지만, CUV(Crossover Utility Vehicle)라는 개념은 분명한 배경을 가지고 등장했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시장에서 프레임 바디 기반 SUV에서 벗어나, 승용차용 모노코크(유니바디) 플랫폼을 활용한 모델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서다. 이 흐름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모델은 렉서스 RX(1998년)였다. SUV지만 모노코크를 적용하고 승용차처럼 부드러운 주행 감각을 강조한 RX는, SUV와 세단의 중간 어딘가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냈다. 이때부터 크로스오버라/CUV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이기 시작했다.


유럽식 크로스오버의 탄생

유럽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크로스오버가 정의됐다. 2000년대 중반까지 해치백 중심이던 시장이 SUV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각진 오프로더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차들이 등장했다. 닛산 캐시카이(2006년)는 해치백 같은 스타일과 SUV 요소를 얹으며, 크로스오버라는 개념을 유럽식으로 풀어낸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한동한 유럽에서는 모던한 SUV를 크로스오버라고 정의했다.


한국 시장의 CUV

한국에서 CUV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은 현대·기아차가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판매를 확대하던 2000년대 중후반이다. 싼타페와 베라크루스는 전통적인 SUV보다는 디자인과 온로드 주행 감각을 강조했고, 크로스오버라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마케팅 언어로 활용됐다.


기아 스포티지 1세대(1993년)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스타일리시한 SUV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크로스오버적 성격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브랜드 인지도와 시장의 준비도는 충분하지 않았다. 쌍용 액티언(2005년) 역시 마찬가지다. BMW X6보다 앞선 쿠페형 SUV였지만, 당시 한국 시장에는 다소 과감한 디자인이었다.


기아의 쏘울(2008년 글로벌 출시, 2009년 국내 출시)은 조금 더 명확했다. 해치백, SUV, MPV의 요소를 섞은 이 차는 한국 시장에서 CUV라는 개념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 모델이었다. 적어도 콘셉트만 놓고 보면, 쏘울은 한국 자동차 역사에서 CUV라는 단어를 실제 의미로 사용한 첫 사례에 가깝다.


SUV 쿠페는 왜 계속 등장했을까

르노삼성의 XM3(2020년) 역시 쿠페라이크 SUV 흐름 위에 있었지만, 브랜드 파워와 실내 공간이라는 현실적인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UV 쿠페는 계속 등장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존 SUV 플랫폼을 활용해 적은 투자로 새로운 모델을 만들 수 있고, 높은 가격 정책으로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제네시스 GV80 쿠페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전기차가 바꿔놓은 새로운 바디타입의 기준

전동화는 이 모든 흐름을 다시 흔들고 있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적용되면서 설계의 제약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 기존 바디타입으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차들이 등장하고 있다.

아이오닉 5, EV6, 폴스타 4는 지금은 SUV로 분류되지만, 10년 전 기준으로 보면 전통적인 SUV와는 거리가 멀다. 기준이 바뀐 것이다.


세단 고객을 노리는 새로운 실험

최근 공개된 르노코리아 빌란테는 그랑 콜레오스를 기반으로 하지만, 전통적인 SUV 고객보다는 그랜저·K8을 고려하던 젊은 소비층을 겨냥한 포지셔닝에 가깝다.

가격대 역시 유사한 만큼, 이 차가 세단 시장을 얼마나 잠식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한국 자동차 시장은 분명 변하고 있다. 다만 그 속도는 늘 느렸고, 변화의 방식도 조심스러웠다.
많은 실패 사례는 틀린 시도라기보다, 시장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경우에 가까웠다.

전동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바디타입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SUV인가 아닌가 가 아니라, 소비자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느냐다.

한국 시장은 늘 늦게 움직이지만, 한 번 받아들이면 의외로 빠르게 따라간다.
지금 우리가 SUV라고 부르는 차들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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