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인으로 산다는 것

by 희미

새롬이랑 함께산 지 거의 3년이 다 돼간다. 100일 남짓 살았을 때 소회를 적은 글을 읽다 보면 코웃음이 나온다. 그 시절엔 새롬이를 집에 두고 24시간 가량 집을 비우기도 하고, 하루에 한 번 10분 남짓한 산책을 다녀오는 걸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평일에 저녁 약속이 있거나 야근이 잡히면 일정이 생기는 순간부터 마음이 불편하다. 거실 한구석 본인의 소파 혹은 캄캄한 안방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하염없이 나를 기다릴 새롬이의 이미지가 그려져서. 홈캠을 설치해두고 회사에서도, 약속 중에도 새롬이가 뭐하나 지켜볼 수 있는데, 이 아이는 내가 없으면 방광이 터질 것 같아도 소변을 참고 참는다. 반려인으로 산다는 건 몸과 마음이 너무도 불편하다.


어제는 밤중에 새롬이가 토사광란이 났다. 이불패드, 이불커버, 덮는 이불까지 테러 당한 사실을 목격한 순간 걱정보다 짜증이 솟구쳤다. 혼잣말로 한숨 쉬고 짜증 내고 엉엉 울면서 토사물을 치우고 사료와 간식 냄새가 진동하는 이불들을 꺼내고 새이불을 폈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25년 2월 22일까지인 반려동물 소화제를 새롬이에게 먹이는데 새롬이가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챘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뒷다리를 덜덜 떨면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솔직히 미안하지 않았다. 짜증과 서러움이 가시지 않은채로 마음에 덜컥 하는 게 있을 뿐이었다. 사람 아기 키울 그릇은 못 되겠다, 생각했다.


고작 노견 한 마리 키우면서 유난스럽다는 생각도 한다. 사람 아기는 혼자 12시간 집에 내버려 둘 수도 없는데, 밥도 차려주는 걸 넘어 혀로 밀어내는 걸 떠먹여야 한다는데, 쉬나 응아도 더 자주, 직접적으로 마주해야할텐데, 배고프다고 불편하다고 새벽에 나를 깨울텐데, 이외에도 내가 짐작 못 할 것들이 더 많겠지. 그럼에도 나 하나 보살피기 버겁다는 사람들 천지인데, 매일같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 저녁 산책하고 발닦이고 말리고, 약 먹이고, 밥그릇 물그릇 설거지하고 채우고, 쉬아 치우고. 주기적으로 발톱 정리하고, 미용하고, 씻기고, 병원을 들른다. 돈도 꾸준하게 많이 깨진다. 바닥에 나보다 가깝게 있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청소도 혼자 살 때보다 더 자주 한다. 걸레질은 최소 일주일에 한번 이상. 쉬아를 치울 때마다 손을 씻다보니 핸드크림을 달고 살아도 버석함을 지울 수 없다.


여행은 가깝든 멀든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엄마가 대전에서 올라와서 새롬이를 돌봐줘야하기 때문에 부탁을 해야하고, 앞뒤로 며칠은 엄마와 함께 생활해야하는 불편이 따른다. 워딩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집은 혼자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퇴근 후에 누군가와 상시 밀린 대화를 나눠야하고 매시간을 함께하는 일은 휴식이 될 수 없다. 쉼을 위해 큰 맘을 먹어도, 엄마에게 부탁을 하고 엄마도 돈과 시간과 몸을 써서 서울로 올라와야 하고, 나에게 또 다른 피로 누적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짧은 주말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권유는 셈을 해보면 오히려 마이너스이기에 침묵한다. 이러한 설명이 엄마에겐 서운함일테니까.


집에 오래 머무는 주말에, 혹은 유난히 지친 평일 밤에도, 서러움이 북받쳐서 울어버릴 때가 있다.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나 혼자 한 생명을 책임져야한다는 게 버거워서. 가족으로 함께 맞이했는데 결국 혼자 남았다는 사실에 슬퍼져서. 그럼에도 수십수백번 다시 생각해도, 태어난 생명에게는 죄가 없기에, 이 아이에게도 짊어져야할 삶의 무게가 있기에, 내가 그랬듯이, 원망이 아닌 사랑으로 품어야한다는 게 결론이다.


사람을, 동물을, 생명을 책임지는 사람을 가깝게 느낀다. 늙거나 어린 존재를 끌어안고, 생명력에 놀라면서도 종종 두려워하는, 수많은 반려인들이 자신에게 너그럽기를, 행복하기를, 함께의 무게를 나눠질 수 있기를 바란다. 버려지고 죽임 당하는 생명들에 슬퍼하면서, 돌보는 존재와 돌봄이 필요한 존재 모두에게 공감하면서. 사회와 대의보다 그들 각자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길 응원하면서. 이해를 구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길.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어엿한 동시대인이 되기에 아직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은 전부 타인의 아픔에 관한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르는 동안, 어떤 이들은 멀리 떠나버리기도 했다. 남겨진 편지가 해독되지 않을 곳으로, 잊히지 않는 것들을 잊은 곳으로. 그 먼 곳에서 안식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기어이 진실을 품고 돌아오는 것이 그들의 몫인지. 그 귀환을 증언하는 것이 많은 비극의 몫인지.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47-48p)

2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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