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새내기와 철학 입문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졸업생의 철학 소개글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만약 철학과거나, 철학과를 졸업했다면 알 것이다. 저 ‘오…….’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들이 숨겨져 있는지.
나는 총 7년간 대학 생활을 했다. 휴학 1년을 포함해 5년간의 학부 생활은 철학도로서, 나머지 2년의 석사과정은 영문학도로서 공부했다. 철학하다 문학으로 전과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워낙 문학을 좋아했기 때문(철학과 다닐 때도 타학부생이지만 문학 수업을 많이 들었다)인데, 한 가지는 확실히 단언할 수 있다. 나는 학부 시절에 철학을 공부하면서 정말 너무너무 행복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을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철학과에 간 것이라고 대답할 만큼.
물론 이 글은 무조건 철학은 최고예요! 철학과에 오세요! 라는 글은 절대 아니다. 내가 철학과를 다니면서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내 성격과 학과 분위기가 찰떡같이 잘 들어맞았고, 학부생이라 대학원에 비해 공부의 양이나 강도가 널널한 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철학과라도 어떤 교수님을 만나는지 또 동기들은 어떤지에 따라 학과 분위기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
앞으로 소개할 철학과에 대한 내용들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따라서 ‘철학과는 다 이렇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게다가 위에 언급했다시피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커리어로 따지면 고작해야 학사학위만 가진 학부졸업생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학사학위란… 없으면 안 되지만 있어도 별 도움은 안 되는 자격증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같은 전공자들이나 석박사 선생님들, 교수님들께서 보고 비웃음을 흘리지 않도록 몸을 사리며 가끔 내가 아는 얄팍한 전공지식도 조심스럽게 풀어보겠다. 정말 얄팍한 수준일 테니 혹시라도 과제할 때 이 글의 내용을 긁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 좋은 점수 못 받을 것이다. ㅋㅋ
철학과에 곧 입학할 예정인데 학교 생활이나 과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거나, 평소 철학에 관심이 있는데 철학과에선 뭘 배우나 조금 기웃거려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앞으로 작성해 나갈 글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다른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철학은 평생 공부해도 끝이 없는 학문이라, 철학과 관련된 글을 쓰면서 나 또한 더 많이 사유하고 공부하려 한다. 석사과정을 끝내고 졸업하니까 학교가 그립다. 철학 석사학위도 따고 싶은데, 대학원 다니다 우연히 만난 철학과 교수님께 이 말씀 드렸더니 ‘얘가 무슨 헛소리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시며 박사나 얼른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박사학위는 시작할 엄두가 안 난단 말이에요. 석사까지는 ‘음 그래, 공부를 조금 하긴 했구나. 잘 정리해서 졸업논문 쓰세요.’ 라는 느낌이라면 박사부터는 갑자기 요구되는 아웃풋의 수준이 확 높아진다. 이미 수백 년간 나보다 훨씬 잘나고 똑똑한 선배들이 유려한 글솜씨로 발표한 논문들을 보며 매일매일 자괴감에 시달리게 되는데, 와중에 미개척된 나만의 새로운 영역을 발굴하여 설득력 있게 소개 및 주장해야 한다.
그러니까 혹시 새내기지만 벌써부터 야심만만하게 대학원 생각을 하고 있다면 학부 과정을 듣는 동안 관심 분야 강의를 잘 정리해 두고, 독어나 불어를 배우면 좋다. 물론 나는… 둘 다 못한다……. 자기소개랑 간단한 인삿말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솔직히 둘 다 한국인에게는 너무 어려운 꼬부랑 언어다. 하지만 기회 되는 대로 배울 것이다. 아, 만약 서양고대철학을 전공하고 싶다면 희랍어와 라틴어를 공부해야 한다. 화이팅.
우선 철학philosophy 이란 무엇일까.
철학과 신입생 대상 강의 첫 시간에 많은 교수님들께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셨던 기억이 난다. 단어 자체만 놓고 보면 앎 즉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을 의미한다. 나와 타자, 세계를 탐구하고 분석·정의·규명하려는 학문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건 뭐고 저건 뭐지? 인간은 뭐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저 현상의 원리가 뭐지?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로부터 출발하는 학문이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철학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만큼 포괄적이고 거대한 학문이라 자연과학, 수학, 물리학, 천문학, 심리학, 정신분석, 예술, 종교, 정치, 경제 등등 연관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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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는 다양한 하위 분야가 있다. 철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것들이 어떻게 묶이거나 나누어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 철학은 매우 거대하고 포괄적인 학문이기 때문에 무작정 나는 철학한다! 라고 덤빌 게 아니라 얼마만큼의 범위 내에서 어떤 내용을 중점적으로 공부할지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정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1) 전통적인 지리상의 경계를 기준으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분류할 것인지 아니면 그 기준의 한계를 보완하는 비교철학 노선을 취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하고 (2) 인식론 형이상학(존재론) 가치론 논리학 등등 다뤄지는 내용에 따른 분류도 숙지해야 하고 (3) 서양철학의 경우 19세기부터는 크게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으로 갈린다. 어느 쪽이 내 성향과 좀더 잘 맞는지 알아봐야 한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1) 철학을 공부할 때 동양의 철학은 동양철학, 서양의 철학은 서양철학 이렇게 지리적으로 나눠서 따로따로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주제나 기준을 세우고(동서양이라는 기준을 어느 정도 또는 완전히 무시하고) 함께 공부할 것인지. 내가 동양철학 서양철학이라는 전통적인 구분을 어떻게 바라볼지 또 어떻게 접근하고 싶은지에 대한 문제이다. 근데 보통 철학과에서는 그냥 동양철학 서양철학 나누고 비교철학 강의는 따로 편성되는 걸로 안다. 그나마도 학부는 관련강의 없는 경우가 많을 듯. (*동서철학의 구분과 비교철학에 관해 조금 더 상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라: 최흥순, 「철학의 새로운 시대전개와 비교철학의 의미」.『철학과 현실』81 (2009):253–264.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지만 시기적으로 좀 오래된 논문이기도 하고, 나도 비교철학에 관해 잘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면 관련서적과 학술지를 탐독하여 최신 연구동향을 확인할 것을 권한다.)
(2) 혹시 철학의 3대 분야 5대 분야 7대 분야 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야 대신 영역 또는 ‘범주’라는 말을 쓰는 사람도 있는데… 이거 또 머리가 아픈 용어라ㅋㅋ 일단 넘어가자. 영어론 그냥 branches of philosophy 보통 이렇게 표현하는 듯하다. 나는 처음에 철학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들이 크게 인식론(Epistemology), 형이상학(Metaphysics), 윤리학(Ethics)으로 나뉜다고 배웠다. 여기에 논리학(Logic)이 더해지기도 하고 미학(Aesthetic), 정치철학(Politics) 등이 윤리학과 함께 가치론(Axiology, 또는 가치철학 Value Theory)으로 묶이기도 한다. (*혹시 가치론에 대해서 보다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다음 링크를 참고하라: Value Theor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보통 철학자들은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다룬다. 예를 들어 칸트의 책 중에 『순수이성비판』은 인식론이고 『실천이성비판』은 윤리학이며 『판단력비판』은 미학이다. 참고로 윤리학은 보통 도덕철학(Moral Philosophy)과 동의어처럼 쓰이는데 뭐 구분하려면 구분할 수도 있고……. 미학과 예술철학(Philosophy of Art)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ㅎㅎ; 둘 다 복잡한 담론이 있으니까 새내기라면 우선 그냥 그렇구나 넘어가고 공부하면서 차근차근 알아보자.
아예 강의명이 ‘미학’, ‘인식론’ 뭐 이런 식으로 나와 있는 강의가 있을 것이다. 그 경우 교수님께서 해당 내용을 주제로 잡고 시대, 철학자들, 주요한 개념과 사상적 흐름 등을 적절히 배치해 강의계획을 짜신다. ‘이번 학기에는 이 시대부터 저 시대까지 활동한 독일 철학자들의 인식론을 살펴보겠어요~’ 이런 식으로. 그래서 오리엔테이션에 꼭 참여해서 강의계획을 잘 들어야 한다. 강의명이 미학이라도 개괄적으로 모든 미학사를 보는 게 아니라 학기별로 특정 시대만 집중해서 다룰 수 있다. 난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배우고 싶은데 교수님이 이번 학기에 르네상스 위주로 강의하신다고 하면 그 강의를 들을 것인지 말 것인지 본인이 알아서 판단하라.
(3) 19~20세기에 영미권을 중심으로 하는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과 유럽 대륙(주로 독일 및 프랑스)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철학(Continental Philosophy)이 대립하게 된다. 철학과에 왔다면 문과일 확률이 높은데 분석철학은 자연과학과 연관이 깊고 수학적인 사고력도 상당히 요구된다.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 이런 유명한 철학자들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기호분석, 논리학 등등에 관심이 있다면 분석철학 강의(언어철학이나 과학철학 이렇게 커리큘럼이 세분화되어 있을 수도 있다)를 들어보자. 시기상 근현대라 고학년 강의로 배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새내기는 논리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으면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어도 어려워서 따라가기 힘들 수 있다……. 그러니 논리학을 독학하든가 관련 강의를 먼저 찾아 들은 후에 분석철학 강의를 수강하자. 대륙철학은 분석철학에 속하지 않은 유럽 중심의 다른 많은 철학 사조들로, 현상학이나 실존주의 구조주의 등등이 있다. 특징은 이쪽이 좀더 문과적이다(...)
그러나 대륙철학이라고 해서 수학적인 사고력이 아예 배제되는 것도 아니고, 분석철학보다 논리적으로 뒤처진다고 감히 쉽게 말할 수 없다. 사실 학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기 때문에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이라는 이분법이 정말로 유효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듯하다.
학부 신입생 때는 우선 구체적으로 철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고픈 분야를 미리 생각해 보자. 물론 편향적으로 내가 관심 있는 분야만 공부해선 안 되고 그렇게 공부할 수도 없는 학문이 철학이다. 서양철학에 더 관심이 있다고 동양철학은 안 배워도 될까? 아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기초적인 정도라도 다 알아두긴 해야 한다…. 난 분석철학이랑 더 잘 맞는 것 같고 대륙철학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지는데 꼭 공부해야 할까? 해야 한다…….
이렇게 잘난 척하며 말하지만 나도 정말 편협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철학을 공부해서 너무 좋았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반성할 기회를 얻었다. 세상에 이해 안 되는 일들 투성이라 어릴 때부터 울분과 화가 많아 투덜투덜댔는데 철학하면서 꽤 차분해진 것도 같다.
여기까지 우선 철학이 무엇인지, 처음에 대학에 와서 학문적으로 접근할 때 대략 어떤 부분을 고려하면 좋을지 이야기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양철학이 많이 어려웠기에(한자의 장벽을 넘기 쉽지 않았다...) 주로 서양철학 강의 위주로 열심히 듣고 졸업했다. 예술에 관심이 많아 예술철학, 미학 강의도 따로 챙겨 들었다. 심지어 미학은 미대 전공 강의였는데 머나먼 미대까지 아침 9시에 가서 들었다. 기초논리학을 진짜 못해서 분석철학 강의 들을 땐 제발 B만 맞자고 생각했지만 A인가 A+를 받았다. 교수님께서 강의를 이해하기 쉽게 잘해 주셨고 모르는 부분은 질문하면 이리저리 풀어서 설명해 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늘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들었다. 한번 흥미가 생기니 어려운 것과 별개로 굉장히 재미있었다. 나는 대륙철학에 더 관심이 많고 공부도 더 많이 했지만, 분석철학 강의를 안 들었으면 후회했을 것이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새로운 흥미를 찾아가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경험도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어려운 분야, 싫은 분야라고 기피하지 말고 골고루 알아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사람에 따라 굉장히 쿨하고 멋져 보일 수도 있고, 뭔가 특이하고 어려워 보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철학이 참 멋지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디 가서 아는 척하려니 말 잘못할까 두려워 고개를 숙이게 되고 이 글 쓰면서도 사실 많이 쫄린다. ㅋㅋ 앎에는 완벽이 없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나의 얄팍한 지식보다 더 많이 아는 분이 계시다면, 내가 뭔가를 잘못 알고 헛소리를 나불대고 있을 때 부디 오류를 바로잡아서 내 우매함을 깨우쳐 주시면 좋겠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철학 공부할 때 바람직한 자세, 철학의 어려움, 겸손의 미덕(흑역사 공개)을 이야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