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새내기와 철학 입문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졸업생의 철학 소개글
지난 포스트에 썼듯이 나는 문학에 열정이 있는 학생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황금 같은 주말을 깎아먹으며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브런치에만 쓰는 것도 아니다. 시나리오든 소설이든 보고서든 내가 매일같이 하는 일이 바로 글쓰기다. 학부생 때도 석사 때도 졸업 후에도 계속 책 읽고 노트북 키보드만 두드리는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학부생 때 문학 전공 학과들의 강의도 많이 들었다. 한 강의에서 중간고사가 다가오기 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과제도서로 읽었다. 『이방인』은 카뮈의 대표작이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라는 첫문장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 지정한 발표자가 나와 이 책에 관한 발표를 했다.
사진출처: Camus, Albert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utm.edu)
실제로 카뮈는 이 작품이 ‘실존주의’로 불리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설명을 살펴보자.
Camus utilized 「The Stranger」 as a platform to explore absurdity, a concept central to his writings and at the core of his treatment of questions about the meaning of life. However, Camus did not identify himself as a philosopher. In fact, he abjured “armchair” philosophy and argued that sitting around and thinking was not enough. One needed to live life as well. He also did not identify himself as an existentialist. He agreed with some proponents of existentialist thought that life has no inherent meaning, but he criticized others for their pursuit of personal meaning. Camus’s concept of the absurd instead implored people to accept life’s lack of meaning and rebel by rejoicing in what life does offer.
출처: The Stranger | Summary, Context, & Analysis | Britannica
그러니까 카뮈는 자신을 철학자로 정체화한 적 없고, 실존주의자로 정체화한 적도 없고, 카뮈의 작품과 사상을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부조리(absurdity)라는 대강 뭐 그런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 카뮈는 실존주의자가 아니구나! 카뮈 작품을 실존주의랑 연관짓는 건 다 틀린 말이구나! 발표자 학생의 말처럼 단어도 어려운데 굳이 작품에다 이런 어려운 철학사조를 붙여서 얘기할 필요는 없구나! 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발표자는 『이방인』을 실존주의 작품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발표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실존주의 철학에서 나오는 담론들과 개념들을 풀어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실존주의라고 꼭 어렵게 얘기할 필요는 없구요. ~~이런 작품이에요!” 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게 실존주의였단 말이다. ㅠㅠ 실존주의를 얘기하면서 실존주의가 아니라니요…?
대학에 오기 전 우리는 모두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화법·작문·문법 등을 배우지 않았던가.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타당한 근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주장과 근거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수능특강에서 이 비슷한 문구를 분명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막상 공부해 보면 또 학문적인 글을 써 보면 생각보다 이걸 지키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만약 『이방인』이 실존주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 주장에 대한 일관되고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카뮈는 이 작품이 실존주의 작품으로 불리지 않기를 원했고 카뮈가 당시 실존주의의 이러이러한 부분들을 비판적으로 생각했으며 『이방인』의 내용 중 특히 여기서 그런 비판적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사실 실존주의라는 사조 자체도 뭉뚱그려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이 다 조금씩 하는 말이 다르니까. ㅠㅠ 근거로 제시하기 전에 공부해야 할 상관관계가 정말 많다. 또 카뮈가 자신을 실존주의자로 정체화하지 않았다 해도, 실존주의와 카뮈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럼 그 학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살펴봐야 하고 내가 그들의 주장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 또한 밝혀야 한다.
이제 머리가 좀 아파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게 이번 포스트의 주제다.
나는 약 3년 정도 운동으로 발레를 배우고 있다. 발레를 하다 보면 신경써야 할 것이 정말로 많다. 호흡은 위로 끌어올리고, 배에는 힘을 주고, 목이 굽지 않도록 바르게 세우고, 척추도 곧게 세우고, 손동작을 할 때 팔꿈치가 내려가지 않는지 계속 점검하고, 기타등등. 한번 움직이기 위해 고려할 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우리에게 멋진 공연을 보여주는 발레리나들은 그 모든 까다로운 조건을 준수한다. 정확한 동작을 통해 우리가 그 몸짓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해 준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공부하면서 신경써야 할 것이 정말로 많다. 우리는 각종 어려운 용어와 이론들을 바르게 사용 및 인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그 용어가 등장한 배경과 사용되는 맥락을 알아야 한다. 어떤 주장을 하려고 할 때는 그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 고심해야 하고 같은 주장을 한 사람들이 있는지, 반대 주장을 한 사람들의 의견은 또 어떤지 살펴봐야 한다. 최신 자료를 위주로 양질의 리서치(자료조사)를 거쳐서 내 주장을 탄탄히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표절 등 민감한 문제에 늘 경각심을 가지고 연구 윤리도 준수해야 한다.
‘이런 말은 너무 어려우니까 안 쓰고 싶어. 다른 쉬운 걸로 대체할 수 없나?’ 없다. 어려워도 잘 알아보고 제대로 써야 한다. 그 용어가 사용되는 이유가 있고 자꾸 연구되는 이유도 있다.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너무 방대해 학습량이 많기 때문이고, 대부분의 경우에 A는 B다라고 함부로 단언하거나 도식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질서있고 정제된, 머리에 쏙쏙 박히는 이분법이나 도식을 추구하게 되지만 철학은 그런 것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해체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 보는 학문이기 때문에 정말 어렵고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나는 철학이 인생의 어떤 명확한 답이나 진리를 찾는 학문이라기보다(이건 신앙이나 종교에 가까운 것 같다. 물론 종교철학도 있다....) 내가 서 있고자 하는 위치를 잡아가는 학문이라고 본다.
이 글을 보는 철학과 학생이 있다면, 철학과에 왜 왔는지 한번 자문해 보라.
제각각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당신은 철학을 배우러 철학과에 왔을 것이다. 그러면 기왕 배우는 거 열심히 잘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대학은 근본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이다. 학문을 배우러 왔으니 학문에 진지한 태도를 지니고 나보다 앞서 이 학문을 정립 및 연구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자. 내가 배우는 이 학문이 엄청나게 긴 역사를 가진, 살아생전 다 훑어볼 수도 없는 거대한 인간 지성의 데이터베이스임을 인지하고 존중하자.
철학을 배워서 뭘 어쩌고 싶은지도 생각해 보자. 슬픈 현실이지만 코난 오브라이언이 말했듯 우리가 전공으로 밥 벌어먹고 살려면 고대 그리스로 가야 한다. 취업을 염두에 둔 학생들은 복수전공을 생각하거나 이미 하고 있을 것이고,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 있는 학생들은 정말 이 길이 맞는지 고민이 많을 것이다.
철학이 당신의 생계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철학을 배워서 후회하지 않을 확신이 있다면 철학하는 게 맞다. 졸업할 때 무엇을 얻어 나갈지는 각자 하기 나름이다. 다만 배우면 배울수록 한없이 겸손해질 것이고, 그래야 한다.
전공서적 말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철학을 쉽게 해설해 준다는 많은 철학서들이 있는데 분명 어떤 것들은 훌륭하겠지만, 어디서 이름 한 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쓴 책이라 해도 형편없는 경우 또한 많다. 다음 포스트를 쓸 때 다시 얘기할 텐데 웬만하면 철학 공부를 할 때는 철학자가 쓴 원전을 사서 읽자. 원전이 너무 어려워서 간략하게 요약이나 정리된 책들부터 시작하고 싶다면, 반드시 사전에 꼼꼼히 검색해 보자. 전공자라고 해도, 자칭 전문가라고 하는데도 유명무실한 사람 많다. 이렇게까지 쓰고 싶지 않은데 정말 쓰레기 같은 책들도 철학서랍시고 출판이 된다…….
학부생 때 ‘아니, 왜 이런 책이 출판이 되는 것이며 왜 저런 사람들이 입 털고 설치면서 철학 전문가라고 유명해지는 거지?’ 싶었는데 철학과에 와서 공부해 보니까 알겠더라. 철학하면서 겸손의 미덕을 배운 사람들은 유유자적한다는 걸.
겸손하지 못하면 정말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나도 학부 저학년 시절 수많은 흑역사를 적립했다. 진짜…… 너무 수치스럽다…. ㅋㅋㅋ 하지만 수치를 느낄 줄 안다는 건 성장했다는 증거니까 그걸 위안 삼기로 한다.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의미에서 나의 흑역사를 하나만 공개하고 이번 포스트를 끝맺겠다.
지난 포스트에서 말했듯이 난 분석철학보다는 대륙철학이 잘 맞았는데, 학부 재학하는 동안 프랑스철학 강의가 거의 열리지 않아서 프랑스철학은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프랑스철학 특히 현대프랑스철학은 정말… 철학자들 이름부터 막 있어 보이고… 푸코가 어쩌고 레비-스트로스가 어쩌고…. 들뢰즈가 어쩌고 데리다가 어쩌고……. 책 펴면 ‘뭔 소리여?’ 싶은데(실제로 공부해도 어렵다) 그 당시엔 그 난해함이 힙해 보이고 프렌치시크 같아 보였다. ㅋㅋ;
그래서 1학년 2학기인가? 2학년 1학기인가? 어떤 강의 기말 페이퍼에 롤랑 바르트를 인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플라톤도 잘 모르면서 바르트는 무슨 바르트였나 싶다ㅋㅋㅋㅋ 나는 내 중간·기말 페이퍼들 전부 제출 전에 한 부씩 더 인쇄해서 보관해 둔다. 작년에 이삿짐 정리하면서 다시 봤는데 어우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고 이걸 보며 점수를 매기셨을 교수님 또는 조교님께 죄송스러웠다.
철학 공부할 기대로 두근두근하면서 대학에 왔을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난해한 공부를 하는 멋진 나…!’ 이런 되도 않는 철학뽕은 빨리 수그러들수록 좋다. ㅋㅋㅋ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아이고, 나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말 별로 없구나. 이렇게 느낄 때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내가 그때 인용한 책이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였다. 불어 못하는 대신 나름 영역본도 찾아보고 했지만ㅋㅋ 맥락상 전혀 적절하지 않은 인용이었다. 내 페이퍼는 전체적으로 A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냥 바르트를 인용하고 싶었기 때문에 뜬금없이 B라는 내용을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나중에 ‘헉, 이게 그 뜻이 아니었구나……!!’ 라고 깨닫고 정말 얼마나 쪽팔렸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일종의 논리적 오류를 범한 셈인데, 이건 정말 흔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굳이 잘 모르는 학자의 이론까지 인용하지 않아도 글 쓰다 보면 꼭 이런 오류 하나씩 발견한다. 나는 졸업 후 석사논문 다시 들춰 봤을 때도 맥락상 말이 안 맞아서 지워야만 했던 문장을 찾아냈다. ㅋㅋ 죽고 싶었음.
잘 알지도 못하는 이론을 멋져 보인다고 아무데나 가져다 쓰면 결국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 눈에는 다 보이기 때문에… 정말 관심이 있다면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만큼 침착하게 공부하자. 물론 철학은 하루아침에 되는 학문이 아니고 완벽하게 마스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너무 노골적으로 틀리지 않을 만큼은 공부하자.
예전에 내가 참 존경하는 교수님께서도 매우 언짢아하시며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남의 글을 인용할 때는 늘 그 글을 상세히 읽고 맥락을 고려하세요. 자기 논조에 끼워 맞추려고 아무데서나 뚝뚝 잘라서 인용하지 마세요.” 즉 내가 A라고 주장하는 글을 쓸 때, 내 주장과 전혀 관련 없는(심지어는 정반대되는) B C D E 글에서 대충 이건 A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는 부분들을 잘라다 핵심 근거라고 쓰지 말라는 뜻이다. A와 적절히 관련된 글에서 A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도록 하자.
다음 포스트에서는 철학과에서 과제할 때 참고하기 좋은 사이트, 과제 레퍼런스(참고문헌) 찾는 법, 기본적인 페이퍼(과제 리포트) 작성법을 이야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