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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미 Aug 14. 2022

『나, 프랜 리보위츠』리뷰

골수 뉴요커의 신랄하고 유머러스한 만평


작년 이맘때쯤 맨해튼의 몇몇 지구들(neighborhoods)과 거리들을 개인적으로 조사할 일이 있었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남이 찍은 영상으로 센트럴 파크 랜선 산책도 하고, 퀸즈-미드타운 터널을 지나는 간접 운전 체험도 했다. 오래 전 뉴욕에 2주 머물 때 찍었던 거리 사진들도 다시 들춰 보았다. 각종 OTT 사이트에 접속해 관련 다큐멘터리를 탐색했다. 그러다가 넷플릭스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찍은 <도시인처럼>(원제 Pretend It's a City)을 봤다. 에미상 노미네이트까지 된 이 다큐멘터리는 작가/비평가/대중연설가이자 뼛속까지 뉴요커인 프랜 리보위츠(Fran Lebowitz)의 서늘하고 재치 넘치는 입담을 온정적으로 담아낸 수작이다. 국내에서도 제법 화제가 되었던 걸로 안다.


다큐멘터리를 본 뒤 프랜에게 큰 흥미와 호감이 생겨 저서를 읽어 보려 했으나 당시에는 국내 번역된 저서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원서로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차일피일 미뤘는데, 얼마 전 알라딘 메인 페이지에 번역서가 나와 있길래 바로 주문했다. 문학동네에서 8월 10일자 초판발행한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책이 너무 웃겨서 3분에 한 번씩 낄낄거리며 즐겁게 완독했지만, 읽는 내내 번역하기 참 까다로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자 후기에서 번역에 대한 고충을 엿볼 수 있었다. 프랜 리보위츠는 70년대와 80년대 뉴욕 문화의 산증인이자 어마어마한 다독가이며 지성으로 꽁꽁 무장한 독설가다. 그런 사람이 쓴 책이기 때문에 독자에게도 일정 수준의 역사적·문화적·문학적 배경지식이 요구된다. 역자의 표현대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더 웃을 수 있는”(p.406) 책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우매한 대중’의 무지에 그닥 관심이 없는 지식인 저자의 자아 표출과 불친절한 블랙코미디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히도 번역서는 역자가 꼼꼼한 주석으로 친절히 설명을 대신해 주어서 읽기가 한결 수월하다. (역자는 기왕 이 책을 읽기로 선택한 독자라면 책에 언급된 작품이나 문화적 배경을 공부해 보라고 당부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의 잠재적 구매 독자 대다수가 이미 관련 지식─교양─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지 않을까 싶다.)


책날개 소개에 따르면 프랜은 본인의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젊은 세대들까지도 열광시키는 아이코닉한 인물이다. 플로피 디스크가 저장을 상징하고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과 자유를 상징한다면 프랜 리보위츠는 무엇을 상징하는 아이콘인가. 무엇이 그녀를 아이코닉한 인물로 만드는가. <도시인처럼>을 본 사람이나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저마다 조금씩 상이하지만 본질적으론 비슷비슷한 키워드를 내놓을 것이다. 내가 책을 다 읽고 선정한 키워드 세 가지는 ‘댄디, 뉴요커, 반항적 꼰대’다.



 사진 직접 찍음 / 프랜 리보위츠 저, 우아름 역, 문학동네 출판



『나, 프랜 리보위츠』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는 The Fran Lebowitz Reader이며, 프랜이 1978년에 출판한『대도시 생활』(Metropolitan Life)과 1981년 출판한『사회 탐구』(Social Studies) 두 권의 책을 1994년에 한 권으로 묶어 재출판한 것이다. 시종일관 위트와 기발함, 촌철살인의 유머 감각, 뻔뻔스러움, 시니컬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서문에서 프랜이 언급하고 역자도 강조한 것처럼 독자는 아무리 이 책이 “현대적이고, 시의적절하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상황을 충실히 반영”했다 해도 “여기 쓰인 글들을 원래 쓰인 당시, 그리고 지금 또다시 의도한 대로”(p.12)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오늘날은 더 이상 프랜이 이 책을 썼던 무렵의 시대, 즉 70년대나 80년대가 아니다. 역자 말처럼 “눈치볼 게 너무 많아 아무 말 쉽게 못하는”(p.406) 시대다. 70-80년대 뉴욕에 살아 보지 않은 나 같은 세대가 이 책을 읽고 너무 감명을 받아서, 프랜의 스타일에 너무나 감화되어서 현대의 라이프스타일·감수성·문화·언어·사회적 가치를 무시 혹은 평가절하한다면 그건 당연히 개인의 자유겠으나 프랜이 해당 독자의 어그러지는 삶을 책임져 주진 않을 것이다. 난 이 책을 재밌게 보고 같이 낄낄대면서도 밖에 나가서는 입 잘 잠그고 다니는 위선적인(좋게 포장해서 체면을 아는) 동시대인과 친해지고 싶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대도시 생활』의 「예술」파트와 「문자」파트, 『사회 탐구』의 「사람」파트가 특히 재밌었다. 인상적이었던 몇몇 문장을 기록하고 리뷰를 마치겠다.






- 진정한 예술적 재능을 지닌 이는 극히 드물다. 그러므로 노력으로 이 판을 들쑤셔보겠다는 건 꼴사납고도 비생산적이다. (…) 당신의 인생사는 책으로 낼 정도가 아니다. 시도조차 하지 마라. (p.25)


- 사실 어떻게 해서든 대중을 금융 재난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법은 있다. 여전한 사실은 금융 재난은 어차피 일어난다는 것이다. 가장 중한 사실은 대중이 그다지 흥미로운 집단이 아니라는 거다. (p.85)


- 내가 잠을 좋아하는 이유는 잠이란 즐겁고도 안전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 잠이란 책임에서 해방된 죽음이다. (p.141)


- 지구만이 삶이라는 현상에 고통받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부질없다. (p.152)


- 미국에서 태어나 자신이 아는 뉴욕에서 일생을 보냈으며 외국으로 향하는 배나 비행기에 발조차 들여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자몽을 뜻하는 몹시도 적절한 영어 단어가 있음에도 같은 의미의 프랑스어로 쓰인 메뉴를 봤을 때 모름지기 분통이 터지고 눈앞이 캄캄해지게 마련이다. (p.162-3)


- 부와 권력은 독서보다는 혈통으로 얻어질 확률이 훨씬 높다. (p.206)


- 사람은, 현재의 가치상승률에도 불구하고─아니, 특별히 현재의 가치상승률을 고려하면─ 그냥 널리고 널린 흔한 것들이다. (p. 251)


- 예의 있는 대화에 실제로 예의와 대화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p. 255)


- 만약 당신이 화려한 새장에 갇힌 새라면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닫도록 하라. (p.309)


- 성공의 옷차림은 성공에 도달했을 때 입는 것이고 그전에는 아니다. 이는 가슴에 새기고 목숨이라도 걸 진리다.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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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heguardian.com/books/2021/aug/28/fran-lebowitz-if-people-disagree-with-me-so-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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