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밭에서 발견한 재발과 전이의 메커니즘 - 2

[이번엔 4기다!] - 22.

by 희나

잡초를 뽑다 말고 생각이 어떻게 그리로 튀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잔디밭 속의 잡초들이 지금 내 몸속의 암세포들과, 치료 과정은 잡초 제거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디밭(몸)잔디(정상 세포)들이 건강하게 잘 살아있는 와중에 그 처음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잡초(암세포)들이 조금조금 생겨나는데, 초반에는 잔디가 빽빽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사람들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보이는 족족 잘 제거해 주면 깨끗한 잔디밭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게 직업이 아닌 이상 사람이 하루 종일 잔디밭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하루 이틀만 신경을 못 써도 생명력 질긴 잡초들은 순식간에 잔디밭 이 구역 저 구역을 점령해 가기 시작한다.


이때, 잡초 제거를 위한 사람의 노력이 투입되기 시작한다.


잡초들은 종류가 굉장히 다양한데 뿌리가 비교적 얕아서 손으로도 잘 뽑히는 잡초("호르몬 양성"으로 대표되는 치료 성과가 좋은 암세포)는 이 지긋지긋한 것들 중에서는 그나마 양반 같은 존재들이다. 실제로 이런 잡초는 큰 힘 들이지 않고 손으로 쏙- 뽑는데(표적치료 1) 뿌리까지 확실히 뽑히기 때문에 제거하기 쉬운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이 잘 뽑히는 잡초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실제 잡초 뽑기를 하던 날 일정 구역의 잡초들을 싹 다 뽑아낸 후 상쾌함과 뿌듯함을 느끼던 중 '혹시..?' 하며 잔디 가르마를 타봤더니 이제 막 싹을 올려서 바닥과 거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같은 종류의 잡초들이 정말 많았다. 심지어 이것들은 너무 작아서 손으로 뽑을 수도 없기 때문에 제초제를 뿌릴 게 아니라면 얘네가 어느 정도 자라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직접 제거에 애를 먹이는 잡초들도 있다. 뿌리가 옆 혹은 아래로 길게 뻗어나가서 지금 보이는 잡초(치료 성과가 좋지 않은 암세포)를 제대로 제거하려면 그 뿌리를 캐내기 위한 노-오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얘네들을 직접 제거하기 위해서는 잔디 뽑는 도구가 반드시 필요한데, 잡초 뽑기 마스터이신 어머니께서 이 도구를 사용하면 최소한의 잔디와 땅만 건드리면서 기술적으로 잡초를 제거할 수 있는 반면 나처럼 낮은 레벨은 잔디며 땅이며 아주 난장을 하며 뽑는다. 어쨌든 뽑긴 뽑지만, 땅이나 잔디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나보다는 어머니가 훨씬 좋을 듯.


도구를 사용하여 뽑을 수 있는 수준이면 그래도 힘든 중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잡초들 중 악독한 몇몇 것들은 잔디와 그 뿌리가 엉켜서 잔디를 뜯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제거를 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기 때문.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잔디 일부도 잡초와 함께 뜯어내야(표적치료 2) 하는데, 이런 잡초들이 너무 많거나 혹은 잔디밭에 잡초가 너무 많아져서 손으로 뽑아내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제초제를 뿌려 잡초를 제거해야만 한다.(전신치료) 제초제를 뿌리는 것이 땅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대로 뒀다간 잡초들에게 잔디밭이 점령당할 것이고, 잡초가 무성해지는 땅은 결국 얼마 안 가 사람이 돌보지 않는 야산같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입을 하고 보니 10여 년 전 1기였던 내가 재발의 과정도 없이 4기로 점프한 것이 한 방에 이해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잔디밭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느닷없이 "안녕?" 하며 쑥 올라와있는 잡초를 볼 수 있는데, 사실 사람의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 뿐 잡초의 풀씨는 이미 잔디밭에 뿌리를 내리고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한 사람의 몸속에서도 하루에 수천 개에서 최대 수십만 개의 세포가 암세포로 돌연변이되는데 대부분의 암세포는 면역 감시 체계에 의해 초기에 제거되기 때문에 발병하지 않지만, 이 감시 체계를 피하거나 파괴할 정도의 상황이 발생할 때 암세포들이 사멸하지 않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이런 과정을 한 번 겪었던 사람은 감시 체계가 약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매일매일 생겨나는 암세포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건강한 사람들에 비해 확률적으로 높은 것이고.


그리고 유방암의 기수가 0기 혹은 1기는 재발이나 전이의 확률이 낮아지기는 하나 그것이 0에 수렴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앞서 잔디밭 가르마를 탔을 때 땅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던 잡초 새싹들처럼 이미 내 몸에는 자라나기 시작한 암세포가 있지만 그 성장 속도에 따라 사람 혹은 의학의 기술이 그것을 인지하는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허. 잡초 뽑다 말고 이 무슨 개똥철학 같은 사유란 말인가.




스스로도 좀 어이없기는 했는데, 생각이 저렇게 정리되고 나니 전이가 된 내 상황이 좀 더 가볍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맞닥뜨린 이 상황은, 안 일어났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실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언제 날아왔는지 모를 잡초 풀씨가 잔디밭에 뿌리내리고 뿅- 하고 나타나는 것처럼, 내 몸에서 암세포들도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뼈에 톡- 하고 붙어서는 자라기 시작했던 것.

어쩌면 내가 1기 진단을 받았던 것도, 실은 이미 그때 혈액을 타고 암세포들이 내 몸 여기저기를 부유하고 있었는데 당시 의학 기술로 찾아낼 수 있는 암세포가 유방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의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세포 단위 크기의 것까지 판별해 내기란 현재까지는 일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지금도 불가능한데 10년도 더 전이라면 뭐)


마음이 가벼워진 덕분인지, 1시간 넘게 햇빛을 잔뜩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식사하러 나가실 때와는 아예 다른 기분의 내가 되어 귀가하시는 어른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른들 눈에는 몸이 많이 아픈 애여서 감정의 기복이 심한가 보다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저는 잔디밭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께 나의 이런 생각의 흐름을 말씀드렸더니 다소 어이없어하시는 표정으로 나를 보시더라.

내 딸이지만 너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난 도무지 쫓아갈 수가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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