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4기다!] - 21.
유방암이 뼈로 전이된 4기 환자인 나.
1기였던 그 시절에는 재발이나 전이가 되면 그 길로 내 인생은 끝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그래서 정기 검진 시기가 돌아오면 혹시나 그 사이 내 몸속에서 또다시 암세포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몹시 예민해지고 병원 가기를 몹시 싫어했었다.
그런데, 1기였을 때 림프 전이 하나 없었는데 어떻게 재발도 아니고 전이가 된단 말인가. 적어도 전이가 되려면 그전에 전조로 재발이 선행될 줄 알았는데 단계를 건너뛰고 전이라니. 충격과 공포를 느끼는 와중에 피어오르는 억울함 한 조각.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대로 재발이 선행되고 이후 전이가 일어났다면 덜 충격을 받았을까 생각해 보면 또 그건 아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딱히 억울할 것도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억울했다. 그래서 뼈에 퍼져 있다는 이 암세포들이 유방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뼈에서 새롭게 발현된 암세포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혹시라도 의료진들이 뭔가 착오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생각 하에 지금 내 뼈에 득실득실 퍼졌다는 이 암세포들이 유방암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정말 맞는지를 담당 교수님께 여쭤보기도 했었다. 원래 이런 거 잘 안 묻는 스타일인데 어지간히 안 믿겼나 보다. 혹시라도 오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도 됐었고.
하지만 의료진들의 임상적 경험을 절대 무시할 수는 없는 일. 그러니 애초에 진료를 보러 갔던 근골격종양센터 교수님께서 CT 사진 보자마자 "최대한 빨리 ㅇㅇㅇ 교수님 진료 볼 수 있도록 일정 잡아주세요"라고 옆에 계시던 분께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2023년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 댁에 내려갔었는데 마침 그때 이모와 이모부도 외할머니를 뵙기 위해 시골에 오셨었다. (부모님 댁과 외할머니댁은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 식사를 하러 가자며 이모와 이모부가 부모님 댁으로 올라오셨는데 하필 이때 내 기분이 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렸다. '내가 지금 이 지경이 아니었으면 이 분들을 모두 모시고 나가서 내가 밥 한 끼를 대접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짜 웃음조차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슬퍼졌던 것이다. 애써 좋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저는 지금 밥 생각이 없으니 드시고 오세요"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아마 다들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이다.
기어이 같이 가자고 하시는 어른들의 권유를 다소 힘겹게 물리치고 겨우 집에 혼자 남을 수 있었던 나는 어른들이 복귀하시기 전에 나의 기분을 어떻게든 환기시켜야 했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그 길로 소파와 물아일체를 이루며 아무것도 안 할 것이란 생각에, 마당에 서서 뭘 하면 좋을지 살피다가 문득 잔디밭의 잡초가 눈에 들어왔다.
잔디밭을 아무리 잘 관리한다고 하더라도 잡초는 부지불식간에 빽빽한 잔디 사이에서 돋아난다. 이게 근데 생명력은 또 기가 막히게 질기다. 잔디는 관리를 안 하면 죽어버릴 수 있지만 잡초는 사람이 관리를 안 하면 안 할수록 그 뿌리를 더 깊이, 더 멀리 뻗어 내린다. '잡초 같은 생명력'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숨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애초에 그곳은 잡초밭이 아닌 잔디밭으로 조성된 곳. 사람에게 발견된 잡초는 그 길로 퇴치를 위한 카운트다운에 돌입하게 된다. 잡초의 양이 얼마 되지 않을 때는 직접 손으로 뽑아준다. 뿌리까지 손쉽게 쏙 뽑히는 종류도 있고, 잔디 못잖게 옆으로 뿌리를 뻗어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는 종류도 있고, 애초에 뿌리를 땅 속 깊이까지 내리고 있어 뿌리 제거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잔디와 땅까지 파내야 하는 종류도 있다. 손으로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양이 많다면 잔디밭 전체에 잡초만 죽이는 약을 치기도 한다. 잔디는 안 상한다고 하나 잔디가 뿌리를 내린 땅에 함께 사는 이로운 것들까지 일부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공격적으로 퍼져나가는 잡초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결정이다.
그래. 나의 머리를 비우기 위해 잡초 네 녀석들이 오늘 좀 희생해라! 내 친히 너를 내 손으로 뽑아주겠다!!
밭일용 엉덩이 의자를 꺼내 앉아 그 길로 잡초 뽑기에 돌입했다. (이때만 해도 무릎 통증의 이슈는 없었다. 아. 옛날이여.) 쉽게 쏙쏙 뽑히는 잡초도 있었고 뽑기 힘든 잡초도 있었다. 뿌리까지 쏙 뽑히는 잡초를 뽑고 나면 묘한 희열이, 잘 안 뽑혀서 중간에 끊어지는 잡초를 뽑고 나면 묘한 약 오름이 느껴졌고, 기어이 잘 안 뽑히는 잡초들이 있으면 순간 성질머리가 살아나며 머리채 쥐어뜯듯 잔디와 잡초를 한 주먹에 쥐고 뜯어내기도 하다 보니 좀 전에 내 상황 때문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씩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단순 노동에 햇빛까지 받으니 기분 전환이 확실히 되는구먼. 잔디를 뽑기로 결정했던 나 스스로를 칭찬하며 "오늘 이 구역 잡초는 내가 작살낸다!!"라며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잡초 뽑기에 몰두했다.
그러고 있기를 30여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뽑아둔 잡초와 가끔 성질머리 부리며 쥐어뜯어놓은 약간의 잔디가 무더기를 이룬 곳에 갑자기 시선이 꽂혔다.
어...?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