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다는 건, 서로의 속도로 세상을 느끼는 일

반려견 레이와 함께 맞춘 가을의 보폭

by 희온

바스락!


가을 산책길은 늘 내 발끝에서 시작된다.


가을이 되면 나는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낙엽이 떨어진 곳을 찾아 더 세게 걷곤 한다.


발끝에서 부서지는 낙엽의 경쾌한 파열음을 들으며

나는 비로소 가을이라는 계절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산책길에서

익숙하던 소리가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내 옆에서 나와 가을과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나의 작은 동반자 레이의 발자국 소리가

귓가에 섞여 들어온 순간부터였다.




| 전쟁 같았던 첫 산책


레이는 나의 첫 반려견이다.


강아지를 어떻게 키우고 산책을 시키는지

전혀 지식이 없던 나에게 레이와의 산책은

매일이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목줄을 처음 잡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함께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의 산책은 늘 전쟁 같았다.


작은 몸에 어찌나 힘이 센지

레이는 늘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를 끌고 갔다.

나는 그런 레이에게 언제나 끌려다녔다.


함께 하는 산책이라기보다는

레이의 냄새 모험에 내가 동행한 느낌이었다.


레이의 강력한 호기심 앞에서

나는 바람 앞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속수무책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반려견과 느긋하게 걷고 있는 다른 견주를 보며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평화롭게 산책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산책은 매일이 그렇게 전쟁 같은 모험이었다.





| 우리의 보폭이 맞춰지던 순간


그러던 레이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기다려줬다.


나는 레이가 냄새를 탐닉하는 시간과 횟수만큼이나

자주 걸음을 멈취 세상의 조각들을 수집한다.


발치에 핀 작은 들꽃,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한 장까지.


산책길에 만난 모든 것이 나에게

"나를 찍어줘!" 하고 손짓하는 것만 같다.


그날도 나는 한참이나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있었고

레이는 저 앞 가로수에 코를 박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는 듯했다.


레이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

씰룩이는 엉덩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이는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코를 박은 채, 꽃 향기를 맡고

예쁜 컷 안에 풍경을 담으려고

핸드폰으로 이리저리 프레임을 맞추는 나를

코끝을 벌렁이며 가만히 바라볼 뿐.


찰칵,

내가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고

"레이, 가자."라고 말할 때까지


레이는 자신의 세상을 잠시 멈추고

묵묵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




| 함께 걷는다는 건, 서로의 속도로 세상을 느끼는 일


IMG_3988.jpeg 가을 낙엽이 예쁜 계절:)


함께 걷는다는 건 결국,

같은 속도로 세상을 느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레이가 나에게 맞춰 걷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내가 레이의 속도를 이해하게 된 순간부터가 아니었을까?


레이가 세상을 냄새로 읽는 동안,

나는 눈과 귀로 느끼며 프레임 안에 세상을 담는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탐험하고

서로의 탐험이 끝날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 주는 사이가 되었다.


낙엽은 여전히 바스락거리고

레이는 여전히 킁킁거린다.


달라진 건 단 하나.

그 모든 걸음이 이제

'우리의 리듬'이 되었다는 것.


오늘 레이와 함께 밟는 낙엽 소리는

이제 나 혼자만의 음악이 아니다.

우리 둘이 함께 만든

가장 따뜻한 가을의 교향곡이다.


이 완벽한 계절 위에서

나는 가장 완벽한 산책 파트너와 함께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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