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을 완전히 걷고 날 그날까지는

<아주 당연한 인생의 12가지 사실>_#12

by 희성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 god 길


대학 졸업 후 김유정 문학촌에 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다. 작은 박물관 안에는 여러 가지 전시품과 작품이 있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다. 시기가 시기여서 앞으로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였는지는 몰라도 벽에 걸린 ‘길’이라는 글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당시엔 참 공감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그 순간뿐이었다. 후 여러 가지 상황들에 흔들리다 보니 그때의 공감되는 마음을 잊게 되었다.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은 매일 같이 '내가 걸어온 길이 맞는 길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했고, 또 '앞으로 어떻게 걸어갈까'와 '걸어갈 길이 있나' 싶은 걱정을 만들었다.


이런 생각과 걱정 속에서 걱정 없이 길을 걷는 것 같은 주위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그들에 비해서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고 처량했다. 인생에는 자신만의 길이 있고,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비교질은 나를 꾹꾹 눌러버렸다.


길에 대한 의문이 들 때, 문득 '창의적 독서와 자기발견'이라는 교양강의에서 과제로 썼던 짧은 소설이 생각났다. 단편 소설을 읽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소설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쓰는 과제였는데, 나는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내용의 이야기에 끌려 아버지와 나의 모습을 담아 소설로 썼다.


그리고 소설 중 주인공이 고민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비 오는 날 강변도로를 걷는 내용이 각나 실제로 비가 오는 날에 소설을 쓰려고 상상했던 그 길을 혼자 걸었다. 다만 강변도로를 걸어야겠다는 것 말고는 딱히 코스를 정해 놓고 걷진 않았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음악을 들으며 걷다 신호에 멈춰 서 있을 때, '빈차'라는 곡이 재생되었다. 곡에는 중 ‘갈 길이 먼데, 빈 차가 없네. 비가 올 것 같은데’라는 고단함과 불안함이 묻어나는 가사가 있다.


런데 평소에는 공감됐던 가사가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의 나는 갈 길이 없는 것 같아 혼란한데, 단순히 길이 멀고 비가 올 것 같아 빈 차를 찾는 투정처럼 들렸다. 물론 가사의 의도와는 다른 나만의 해석이지만, 그 순간엔 그랬다.


사람들은 인생을 길에 빗대어 말한다. 인생이란 길은 죽을 때까진 끝이 없어서 계속해서 걸어야 한다. 그런데 인생이란 길은 모양이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잘 닦인 고속도로를, 누군가는 울퉁불퉁하고 먼지 날리는 흙길을 걷는다. 또 누군가는 꽃길을, 누군가는 가시밭길을 걷는다.


길을 걷는 속도와 고단함도 다르다. 누군가는 그냥 걷고, 누군가는 뛴다. 누군가는 다리에 채워진 족쇄 때문에 걷는 것조차 힘든 반면, 누군가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간다. 누군가는 신발을 신고 걷지만, 누군가는 맨발로 걷는다. 심지어 누군가는 걸을 다리가 없어 팔로 기어간다.


길을 걷는 의지도 다르다. 누군가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누군가는 억지로 등 떠밀리거나, 심지어는 끌려서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게 된다. 더욱이 남들은 빠르게 잘만 가는 것 같고 남들의 길은 꽃길인 것만 같은 반면, 항상 나는 느린 것만 같고, 내 길은 너무나 힘든 길인 것인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런 불안감과 함께 안개가 자욱하게 껴 한치 앞길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도 찾아온다. 그래서 이리저리 둘러보다 어디가 앞이었는지를 잊게 된다. 그리곤 혹 앞이 낭떠러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반발심과 함께 걷다 고민을 잊게 되었을 때쯤에 강 옆에 세워진 동상을 기점으로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강변도로를 걷는다는 것 외에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없는 걸음은 고민을 잊게 했는데, 돌아갈 집이라는 목적지가 생긴 걸음은 여러 생각을 만들어 냈다.


내 길과 상황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 불평과 원망이 많았다. 내 다리에 족쇄가 채워진 것만 같은 느낌과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음을 원망했다. 왜 이렇게 서둘렀나 싶기도 했다. 언제나 뒤처지는 것 같아 앞서가려고 안간힘을 쓴 나머지 소중한 인연들을 흘려보냈음에 후회했다.


그러나 나는 건강한 다리가 있었고, 가시밭 길을 걷는 것 같을 때에도 가시로부터 발을 지켜줄 신발을 신고 있었다. 또 길을 알려주신 훌륭한 스승들이 있어 잠깐 헤매긴 해도 결국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가는 가 보다 누구와 함께 가는 가다'라는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나에게는 매 순간 같이 걸을 수 있는 좋은 인연들이 있었다.


길에 대한 생각은 하기 나름이다. 놓여 있는 예정된 길을 걷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내 길은 내가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기에 남들에 비해 느린 속도와 힘든 길에 대한 불평도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길이 다름은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는 너무 당연한 이 말은 당연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그 끝이 낭떠러지라면 결국 빠르게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느리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면 적어도 떨어질 일은 없다.


길을 걷다 지치는 순간도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쳤다는 것은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그만큼 열심히 걸었다는 의미다. 지쳤다는 생각이 들 땐 쉬어도 된다. 가끔 걷다가 안개가 끼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순간에도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걷는다면 어느새 안개가 낀 구간을 지날 수 있다. 그저 계속 걷기만 하면 된다. 다만 한 가지, 그 길을 완전히 걷고 날 그날까지는 몸과 생명이 결코 꺾임이 없을 걸 굳게굳게 믿으면서.


아주 당연한 인생의 12가지 사실

놓여있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도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에게도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길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