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아주 당연한 인생의 12가지 사실>_#11

by 희성

고등학교 시절 '멘토링 학급(동아리)'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학생이 직접 원하는 담임 선생님의 동아리를 골라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원서를 작성해서 선생님께 드리면 면접을 거쳐 최종 선발이 된다. 이렇게 구성된 동아리의 총원은 20명 안팎으로 학년 별로 7~8명 정도다.


동아리는 '국영수사과' 등의 정규 수업을 듣는 행정반과는 별도로 운영된다. 동아리에서는 주로 동아리 특색에 맞는 활동을 하며, 교내에서 주최하는 토론, 스피치, 풋살, 농구 등을 하는 '리더십 대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주말에는 봉사 활동 및 친목 활동을 한다.


이런 동아리는 1년을 주기로 바꿀 수 있지만, 나는 고등학교 3년을 같은 동아리에서 같은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아직도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나와 친구들은 처음 학교에 온 1학년 당시 3지망까지 지원했던 동아리에 전부 떨어져 무작위로 배정받은 학급에 모인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이런 동병상련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친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내가 속했던 동아리는 국어 동아리로, 동아리 시간엔 주로 에세이를 쓰는 특색 활동을 진행했다. 한 가지씩 주제를 제안하고 그중에서 채택된 주제로 쓴 에세이를 발표하는 활동으로, 언젠가 내가 제안한 '유서 쓰기'라는 주제가 채택되어 에세이를 쓴 적이 있었다.


<가족들에게>

사람은 자신이 죽을 날을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저 역시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19년 짧은 인생이지만 삶을 돌아보면 당신들께서 주신 사랑은 제게 넘쳐흘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 같습니다. 제가 죽은 뒤에는 제게 주신 사랑을 주변에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세요. 또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을 기부하여 누군가가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친구들에게>

너희들과 함께라는 사실은 정말 놀라웠던 것 같다. 너희들은 내게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고 그 사실은 나를 정말 행복하게 만드는구나. 난 19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너희들의 삶은 한참 남았기에 여러 가지를 말하고 떠난다. 아마 지금 너희들의 가장 큰 고민은 대입과 취업 등이겠지. 그러나 그건 가장 큰 고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너희의 행복이 너희 삶에 1순위가 되기를 바란다.


다만 너희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는 삶을 살지는 말아라. 너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 또 너희들의 삶은 한참 남았지만 죽음을 앞둔 순간에는 인생은 지나가는 바람 같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라. 또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또한 재물을 모으는 것이 너희들의 즐거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실감 나지는 않겠지만 죽음을 앞둔 뒤에는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너희들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라. 너희들의 삶은 다 의미가 있는 삶이니까. 나중에 하늘에서 만날 때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자.


<마지막 말>

19년 인생은 솔직하게는 짧았다. 아름다운 지구에서 가보지 못한 곳도 많았고, 해보지 못한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하늘나라에서 만들어 갈 추억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 행복을 포기한다는 사실은 모른다. 무엇을 그리 많이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고3이 되었을 때는 여러 가지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다 부질없다. 행복을 추구하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을 주지 말아라. 특히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학업을 열심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들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불행해하지 말라. 또한 너희들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이 세상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라.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마주한 것 같은 시기를 보내고 다시 이 에세이를 보게 되었다.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명언들을 짜깁기한 것 같은 이 에세이는 죽음과 거리가 멀고 현실에 대해 아는 전무한 19살짜리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아 웃음이 났다. 더욱이 이렇게 생각해놓고 정작 나는 무엇을 그리 고민하면서 살아왔길래 행복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웃음이기도 했다.


이상한 웃음이다. 그 순간엔 하고 싶은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고민으로 다가와 지금의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지. 어쩌면 내가 해왔던 그 모든 일이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나는 선택의 순간에서 한 번도 현실을 고려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그렇다고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학은 가겠다고 고집을 했다. 낙방 후에 재수한 것도 아니고, 학점은행제 학교에 진학해 다시 입시를 준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 와중에도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각종 시험에 통과할 때마다 부족한 내 실력과 노력보다 과분한 결과를 얻은 것만 같아서 '그저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했다. 새로운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남들에 비해 내 능력은 한없이 뒤처져 있었다. 내가 내놓은 결과물들은 남들의 것에 비하면 초라하게 그지없었다. 그래서 전혀 행복할 수 없었다.


아마 그 순간 내가 느낀 행복은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을 뿐,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행복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내 선택이었기에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다. 내 선택의 결과에는 내 탓만 있었다.


고 신해철 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생의 가장 깊숙한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공은 운입니다. 지금까지 성공을 거두었던 사람들을 보면 어떤 노력 같은 것들도 있지만, 운이라는 것은 매우 강력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운을 얻을 운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설계할 때 '만일 운이 통한다면'이라는 기준으로 설계해서는 안 됩니다. 통했을 경우와 통하지 않았을 경우 두 가지를 다 설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지 않는 싸움이 됩니다...


운이란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무언가를 원할 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할 뿐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하기 싫은 일은 하는 것은 아니다. 하기 싫은 일처럼 보여도 어쨌거나 포기하지 않은 일은 스스로가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이 이루어진 것을 보며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운 중의 운은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날지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할 수 없다.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운을 타고난 것이다. 또한 하기 싫어도 포기하지 않은 일은 스스로 원했던 일인 것처럼, 사는 것이 힘들어도 여태까지 살아왔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삶을 원했다는 반증이다.


언제나 행복하고 싶은 우리는 현실을 고려하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는다. 그런데 진짜 고려해야 할 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란 그저 우리가 타고난 운 위에 있는 것이다. 현실이 행운이 될지 불운이 될지는 삶이 행복한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행복한 삶 위에서 행복한 현실이 생기는 것이다. 현실이 행복해야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우리의 삶은 내가 하고 싶은 행복을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만일 불운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을 행운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현실에 내 운을 끼워 맞추고 있기 때문에 불운한 것이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남에 의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또 내 운을 다른 사람의 운을 기준으로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행동 역시 불운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가장 큰 불운은 삶이라는 운이 끝나는 순간이다. 신기한 것은 이상하리만큼 은연중에 불행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들이 세상에 만연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이 에세이를 쓴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꽤 행복했기 때문이다. 수업을 듣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동병상련을 함께한 친구들과 만나 매 순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에겐 좋은 사람들을 만날 운이 있었고, 그것이 날 행복하게 만들었다.


'왜 행복하지 못했나'하는 생각의 답은 지금의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운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운과 다른 사람들의 운에 내 타고난 운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복한 기준과 세상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기준에 내 운을 억지로 맞추려다 보니 불운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운은 보지 못한 채로.


죽음을 아는 시한부에게 가장 행복한 것은 그저 삶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남은 운이 다하기 전까지 행복을 찾아 나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만약 당장 내일 죽는다면 무엇을 하게 될까. 가장 행복한 무언가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 중의 운이란 삶을 타고난 우리들은 그것이 언제 다할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한부와 같이 알면 아는 데로, 우리와 같이 모르면 모르는 데로 최선을 다해 행복을 찾아 나서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언젠가 타고난 운이 넘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 땐, 그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 순간을 알면 아는 데로 모르면 모르는 데로 내 운이 커다랬구나 하면서.


아주 당연한 인생의 12가지 사실 중 열한 번째

운이 끝나는 순간을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타고난 운을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