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보는 세상 - 영화 오펜하이머
#놀런의 놀라운 눈
나는 무언가의 ‘팬’이 되어본 적은 없다. 누군가는 쉽게 중독되는 것이 단점이라 하지만, 오히려 장점이라 생각한다.
오펜하이머를 보며 감독의 특징을 꿰뚫는 팬심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영화를 두 번 보는 일은 없는데, 이 감독의 작품들은 수없이 다시 본다.
그는 ‘놀런의 눈’을 가졌다. 모든 인간이 같은 색을 보지 못하듯, 세상의 반은 결코 보지 못할 세계를 담아낸다.
그럼에도 그는 소수에게라도 전하고 싶은 진심이 있기에 나머지를 과감히 버린다.
나는 다행히 제쳐진 반은 아닌 듯하다. 지식의 한계로 놓친 디테일은 있겠지만, 분명히 ‘뭔가 있음!’은 알겠다.
내 눈이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오만함의 양면
신은 주사위 놀이를 안 한다니,
인간이 신을 어찌 정의할까..
그러니 땅콩을 차였지..라는 생각.
인간의 오만함이 신의 영역까지 넘어설 수는 없지만 한계에 갇힐 필요도 없다.
그런 오만방자한 자기 믿음이 결국 아인슈타인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물리학자로 기억되게 하지 않았을까.
인간의 능력도, 오만함도 모두 양면 이상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인간=모순
인간은 영원히 고통받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영원히 사는 것에는 목을 맨다.
영원한 삶과 영원한 고통이… 많이 다른가..
#영화화되는 인간의 복잡성
단순한 인간은 상상도 재미없다.
체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인간은 사업 파트너로는 좋겠으나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아니다.
영화화되는 인물은 평범하지 않은, 그 자체로 작품 같은 삶을 산다.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쉽지 않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인간.
#인위적 변형은 결국파괴인가
삶을 편하게 해주는 모든 물건은 결국 환경을 파괴한다.
다행히 지구는 생각보다 넓지만,
세상의 원상태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면 결국 다 쓰레기 아니면 재가 되는 듯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이해되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드러나기 전까지 모든 가능성은 공존한다.
어떤 순간, 어떤 인간에 의해 가능성이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수많은 과학자의 수년간 연구가 ‘딸깍’ 1초도 안 되는 찰나에 달렸다니..
#능력이라는 것의 함정
천재의 능력은 축복이자 함정이다.
선을 위해 쏟아부은 능력도 탐내는 이들 손에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인다.
능력이 클수록 선의 영향력도 커지지만,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빠질 가능성 또한 커지는 듯하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없앨 수도 있었던 선택을 해야 했던 과학자가
과학자라는 죄를 알았다 라니.. 먹먹했다.
지금의 개발자들도 슬슬 개발자라는 죄를 알 때가 되지 않았나..
#최선의 선택을 할 뿐
오펜하이머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폭탄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타깃은 일본이 아니었을 수도,
다른 능력자였다면 히틀러가 타살이었을 지도,
과거의 순간은 특정된 인물을 품고 있지만
현재는 과거가 되어야 사건과 함께 최후에 남을 인간이 결정된다.
업적에 의해서든 조작에 의해서든.
그러니 인생에서 전력을 다해 볼 기회가 있다면 기록보다 내 삶의 가치를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한다.
옳고 그름은 알 수 없어도, 그 순간 옳다고 믿는 것을 따라가면 된다.
최선이었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인생은 가설이고, 옳음과 그름은 완전히 정해질 수 없다.
그러니 타인의 소리에 휘둘릴 이유도 없다.
어느 업적도 반드시 선하기만, 악하기만 할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은 가설이다
이미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고 아는 것이 알던 것이 아닐 수도, 본질이라 알고 있는 것도 쪼개질 수 있다.
완성이라 생각되는 상태 또한 한 순간일 뿐, 그 끝을 끝이 있음만이 유일하게 결정되어 있는 인간은 알 수 없다.
완성도 완벽도 가설일 뿐 완전하지 않음이 언제든 드러날 수 있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아닐까.
알고 있는 단어들이 사실 내용 없는 빈 껍데기였음을 점점 알게 된다.
인간은 결국 가설의 순간들을 살뿐이다.
다 믿지도 말고 내 믿음을 잃지도 말 것.
인생이 가설이라면
오늘이라는 하루는 그저 실험의 한 장면일 일지도,
성패와 결과를 떠나 순간의 장면들이 아름답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