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없이 비울 줄 알았다. 휙휙, 버릴 책더미를 보며 마음이 시원할 줄 알았다. 한 권을 책장에서 빼면 펼쳐보지 않아야 했지만 책을 여는 순간 책 속에 들어가 청승을 떨었다.
반나절을 매달려 정리해 방 문 앞에 내놓은 책은 열 권이 채 안되니 딸랑 한 뼘 정도다. 실망스러운 비움의 다짐을 안 하느니만 못했다. 희망하는 시간만큼 집착을 끌어안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다.
1차 책정리 요약은 '좌절'이다.
거의 다 읽은 소설 전집을 왜 버리지 못하는 건가. 윤후명, 한수산, 박완서, 이청준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어 그렇겠지. 2차 책정리에 도전하겠다. 마음에 두었으니 되었다 매일 다짐해야지.
책 정리를 하다가 루 살로메를 발견했다. 고서 마냥 짙은 갈색이다. 아주 오래전 내 손을 타며 낱장 종이 귀가 닳도록 읽고 또 읽었던,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 낡은 모습이 짠하다.
책 정리를 하다가 책 수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건 또 뭔지. 목적을 잃은 괴팍한 고집, 그 또한 정리해야 할 내 몫이다.
올해가 다 지나기 전, 읽은 책은 모두 정리하겠다. 픽션과 이루어지지 않을 상상을 품은 책들을 미련 없이 버릴 것이다. 소설을 버리고 전공서들을 내놓고 공부하며 정리했던 많은 노트들과 제본 자료들을 폐기하겠다.
갑자기 올려다본 책장 한편에 초판부터 최근 5판까지 나란히 꽂아 둔 집착을 보며 다시 마음이 흔들린다. 명치 깊은 끝부터 타들어가듯 뜨겁다. 벌써 두려움 한 아름에 그냥 가지고 있을까 횡설 수설 갈피를 못 잡는다.
책을 정리하는 것이 이렇게도 힘겨운 일인가. 너무 책에만 기대 살아온 탓인가한다. 책 보고 나가 사람 대하다 조롱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왜 나는 사람보다 결국 책을 택해왔는지 모르겠다.
정리할 책 더미를 바라보니 마치 나 자신을 폐기해야 하는 미션을 받은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2차 책정리 목표는 한 뼘이 아니라 한 길이다. 내 키만큼 정리할 거다.
다짐만 거창했던 초라한 내 모습을 기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