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슬픔이 동후의 시간으로 들어찼다. 준하는 여전히 인턴을 근근이 견디고 있었고 동후는 준하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손짓도 할 필요 없는 눈빛으로만 갈망하는 시간들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준하에게 도발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후는 문득문득 자신의 감정을 한 번쯤은 말해도 좋지 않을까 준하 앞을 서성거렸다.
준하는 어떤 사람일까. 희서를 향해 있으면서 동후를 바라볼 수도 있을까. 동후는 매번 허락되지 않을 또는 영원히 거부될 수도 있을 그 가능성을 슬프게 누르고 있었다.
어떤 종교적인 위안도 본능을 울렁이게 하는 정체성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신을 향해 공부하고 성경을 읽으며 맞는 당황스러운 자신의 이중성에 동후는 떨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선과 악이 등을 붙이고 같은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었다.
왜 이건 옳지 않다고 인정해야 하는가, 왜 이건 가야 할 길인가에 대한 해답을 누가 줄 수 있을까. 준하에 대한 마음은 옳은가 옳지 않은가. 준하에게 한 번도 내밀어보지 않은 손을, 한 번도 건네보지 않은 그 말을 결국에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동후는 매번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갑자기 비겁해졌다.
모닝콜 같은 메시지를 준하에게 남기며 시작하는 아침, 바로 날아드는 준하의 굿모닝에 동후의 하루가 시작된다. 이상하게도 너무 자연스러워진 루틴에 마치 부부라도 된 것 같았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따뜻하게 연결된 보이지 않는 다리를 서로 달려와 오늘도 잘 지내요 모닝 입맞춤을 하는 다정함을 느끼는 그런 시작이라고 동후는 느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점심이든 저녁이든 만나 그간의 일들과 마음을 열어 두고 서로를 공감하며 웃고 떠드는 시간들에 감사하며 사는 동후였다. 준하가 희서와 같이 했던 과거의 촘촘한 기억들을 들추며 쓸쓸한 듯 흥분한 듯 이야기할 때도 동후는 행복했다. 준하의 모든 것을 같이 하고 있다는 충만함에 그저 기쁜 동후였다.
가끔, 아주 가끔, 준하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러면 모든 시간들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동후는 성당 구석 자리로 흘러들어 고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저 지금을 지탱해 나갈 힘을 주소서. 우정보다는 조금 더 진한 친구와의 평생을 오롯이 허락해 주소서. 하지만 자신이 기도보다도 훨씬 깊은 회색의 심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동후는 위선적이면서도 달콤한 속죄를 위한 기도를 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희서한테 가보려고…”
“미국에?”
“응, 희서가 너무 보고 싶어.”
준하가 저렇게 말한다는 건 이미 비행기 티켓도 다 준비했다는 의미였다. 뭐든 말하는 것과 동시에 준하는 벌써 하고 있었다. 충동과 말과 실행이 평행선인 것 같은 준하를 동후는 항상 신기하게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냥 한번 바라보고만 와도 좋겠어. 신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