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서는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준하일리 없어. 그 애는 한국에 있는 걸.'
희서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다. 박사과정은 그야말로 전쟁처럼 끝없이 달려야만 하는 곳이어서 팀 프로젝트라도 해야 멤버끼리 같이 점심이나 저녁이라도 할 수 있었다. 기다려주는 사람을 가진다는 건 사치였다.
다시 한번 건물 앞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서 있는 게 확실했다. 몽롱하고 현기증 나는 이마에 손을 얹고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나무에 기대어 있는 저 사람, 준하 맞다. 준하다. 모든 게 멈춰 버렸다. 희서의 눈도 멈췄고 힘을 주고 있던 이마도 손도 혈관을 타고 흐르던 피까지도 다 차갑게 멈춰버렸다. 그냥 제대로 서 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꿈일까. 먼지처럼 푸시시 사라져 버리진 않을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시선을 고정한 사람 또한 미동도 하지 않고 희서를 향해 멈추어 있었다.
항상 혼자였으니 혼자가 당연한 이곳 미국에서 희서는 그 그림자와 실루엣과 실현되는 살아있는 형체가 어쩌면 희서를 위해 서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나만을 위해 넌 거기 서 있는 건가.
손을 내밀거나 소리 내어 준하를 부르거나 그에게 뛰어가거나 할 수가 없었다. 마음 깊은 어둠으로부터 올라오는 꾹 눌러왔던 외로움이 희서에게 다가와 진정하라 다독이고 있었다. 가여운 외로움이 부른 환영인 걸까.
준하가 다가와 벽에 기대 당황하여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희서의 팔을 잡았다. 희서는 그제야 마치 볼을 꼬집은 것처럼 세상을 실감했다. 현실이었다. 그런데 왜 준하는 여기에 있는 걸까.
희서 자신을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는 미국이다. 준하가 옆에 있다. 우리는 낡은 나무 벤치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꽤 오랜 시간을 현실로 돌아오려 애쓰고 있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피부와 마음으로 직접 느껴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현실이 아니면 희서의 꿈이거나 충동적 실현이거나 갈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슬플 테지만 희서가 살아가는 외로운 습관이니 받아들이는 수 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많이 그리웠어. 오랫동안..."
준하의 목소리는 너무나 낯설었다. 이렇게도 낮은 저음이었던가. 이렇게도 위태로운 슬픔을 한껏 머금고 있었던가.
이런 걸 기쁨이라 부르는 건가. 황홀이라 부르는 건가. 괜히 편두통으로 도진 약한 마음이 감상적인 행복감으로 치닫는 건가.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옳은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 어리석음을 어찌한단 말인가. 준하와 희서는 넉히 서너 시간을 벤치에 그냥 앉아 현실과 상상의 혼란을 수습하려 애썼다.
"저녁 먹을까?"
그제야 희서는 어둑해지는 공기를 느끼며 미안해졌다.
학생식당의 저녁은 꽤 정찬이었다.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 조각이 나왔고 풍성하게 시저 샐러드가 나왔다. 준하는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희서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커피 한잔으로도 저녁은 충분했다.
준하의 스테이크 써는 모습을 마치 오랫동안 보아온 것만 같았다. 희서는 문득 그녀가 너무 오래 혼자였던가 생각했다. 이런 작은 장면들에 목이 메는 자신이 너무나도 측은했다. 가끔 정말 맛나다는 듯 희서를 보며 미소를 흘리는 준하를 보면서도 갑작스러운 초현실에 자꾸 팔을 꾹꾹 눌렀다. 현실임에 틀림없었다.
렌트를 한 준하가 숙소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다음 날 다시 그 자리에서 기다리겠다 했다.
다음 날 그 자리는 그 자리에 있을까. 준하가 서 있던 자리를 그대로 준하가 채우고 있을까. 희서는 내일 그때쯤 그녀의 수업이 어떤 과목인지 확인하고서 조금 일찍 나가 준하가 올 그 자리를 확인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미국에서 이틀째, 두 번째 준하를 만나는 날이었다.
혹시 이게 꿈인 걸까. 아, 꿈이었던 거야?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침대 모서리에서 잠을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