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하를 만난다면 꼭 물어보기로 했던 두 개의 실크 나이트 슬립에 대한 건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왜 막상 준하 얼굴을 보면서 생각이 안 났을까. 꿈이라서 그런건가. 갑자기 뭔가 희서의 시간이 흐트러진 느낌이 들었다.
편두통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무거워 뭔가 예감이 안 좋으면 혹시나 하는 공포에 거울을 먼저 보곤 한다. 그러면 거울 속의 희서 자신의 얼굴 일부가 투명하다. 투명한 건 안 보이는 것과는 다른 걸까. 그러고 나면 곧 지근한 통증이 뜨거운 눈으로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통증이 중심을 향해 찌르는 듯 심해지면 뇌의 어디선가 들려오는 통곡이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눈이 빠져나갈 듯 한 현기증에 손을 짚으며 한 발씩 천천히 나가며 사는 속도를 줄여야 했다.
그런 폭풍과도 같은 시간을 겪는 동안 준하가 들어왔다. 무턱대고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몸이 무너지고 있을 때 마음도 같이 허물어지는 게 사람 아닌가. 마치 희서를 보호해 주려 준하가 온 것처럼 말도 안 되는 환상을 잠시 맛본 것이었다. 어제 하루가 한 편의 삶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준하는 그 나무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래, 그게 꿈이었든 실제로 찰나처럼 만나 하나의 생으로 마감되었든 간에, 중요한 건 지금 저기에 준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준하가 없어. 슬프면 안되는거다. 어차피 그렇게 흘러온 게 희서가 살아온 인생 아니었던가.
편두통 없는 오후는 차가운 이성으로 사람 하나를 한 페이지에 욱여넣어 놓고는 다음 장으로 서둘러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프지 않은 거지?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려 있는 힘을 다해 애를 쓰는 동안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이 뜨겁게 같이 흐르며 마음이 아팠다. 괜찮아. 괜찮아.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희서는 습관처럼 팔을 뒤로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을 폭력으로 규정한 지 오래였다. 특히 미국에 와서는 더더욱 그랬다. 어깨를 잡는 손의 힘이 달랐다.
"What is it!"
준하였다.
젖은 뺨을 얼른 돌렸다. 피곤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는 듯 손짓을 하며 눈물을 재빨리 닦았다. 준하는 당황한 듯 내 가방을 어깨에서 가져갔다.
"오늘 힘들었나 보구나. 피곤해 보이네."
"응,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읽어야 할 것들이 많아서 거의 밤을 샜거든."
대강 대강 지난밤으로 둘러대고 이성을 찾으려 애썼다. 나무 아래 기다리던 준하는 다른 곳에서도 희서를 잡아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고도 새로운 느낌들이었다. 준하와 같이 공유하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며 이성적으로 정리해보려 노력했지만 설명이 되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야 다음 단계를 가늠할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미국에 온 후 첫 번째로 배운 나 자신을 지키는 규칙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러면 반드시 생각지도 않은 상황들이 벌어지곤 했다. 내 어깨를 거세게 움켜 잡았던 Reis가 떠올라 갑자기 몸이 떨렸다.
준하에게 가방을 떠넘긴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인데 게다가 그저 조용히 준하가 가는 대로 따라가고만 있었다. 준하는 운전을 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서 또한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차가 앞쪽으로 달리고 있으니 목적지에 닿으면 설것이고 그때 거기가 어딘지 살펴보면 될 것이었다. 그런 빈틈을 훌훌 내보이며 오랜만에 연이어 이틀, 두 번째 만나는 준하에게 희서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내맡기고 있었다.
준하가 다다른 곳은 코네티컷 하트포트 공항이었다. 떠나려고 오늘 희서에게 온 준하였다. 희서는 여전히 준하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