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짧은 여행이었지만 가장 길게 너를 보았던 시간이었어."
'짧은'과 '길게'라는 말이 희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달랑 두 글자의 단어 두 개가 마음속 깊이 흘러들었다. 준하의 '가장'보다 희서가 끌어안은 두 개의 단어가 희서를 더 살려낼 것 같았다. 희서가 살아온 바짝 마른 건조함을 돌아보게 할 것 같았다. 어디든 부딪히기라고 하면 가볍게 이가 나가거나 깨져버리는 얇은 그릇 같은 존재로 산 시간들이 눈물로 흘러내렸다.
"너 울보구나."
사람으로부터 받은 진심의 시간이 언제였던가 싶었다. 이 뜨거운 호사를 그냥 누려도 되는 건가 하는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준하는 차분해 보였다.
"네가 옆에 있으면 했던 시간들이 길었지만 혼자 비겁했다가 지금에서야 네게 왔네. 미안하다."
그 시간의 시작을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바로 지금 준하가 희서 앞에서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준하에게 손을 쑥 내밀었다. 미국에서 조심조심, 억누르며 살았던 인간적인 감성들이 희서를 부추기며 뭔가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악수를 청하는 희서의 손을 준하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 준하는 희서의 팔목을 잡아 앞으로 끌어당겼다. 악수하는 거리가 갑자기 좁혀지면서 당황한 희서는 다른 손으로 준하를 밀쳐냈다.
"아, 미안..."
준하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희서도 따라 웃었다.
"1무 1무야."
승도 아니고 패도 아니고 둘 다 무승부인 당황의 순간들에 준하가 엉뚱한 판정을 내렸다. 머쓱한 웃음이 되었지만 그런 순간마저 마음에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서는 마음을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내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이런 시작을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단 하나의 사람이 온기를 품고 희서에게 왔다.
"다음에 내가 갈게. 방학하면 한국에 한 번 들어가려고 했었어.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볼까 하거든. 논문 준비는 한국에서 하게 될 것 같아. 이런저런 상황을 알아보려고 해. "
지도교수에게 보고하듯 딱딱해지는 단어들, 고작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한 보고를 하는 듯한 자신에게 실망하면서도 희서는 준하에게 먼저 한국으로 가겠다는 말을 한 것에 안도했다. 그것 또한 용기일 거라 혼자 다독였다. 다음에는 희서가 준하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하겠다고 전하고 있는 시간과 사실이 중요했다. 그건 누가 들어도 사람 사이의 지근한 뜨거움의 시작을 의미했다. 준하와 희서의 시작이었다.
미국에서의 남은 몇 개월을 치열하게 보내면 기본적인 이론들을 배우는 과정이 모두 끝나게 된다. 논문 작성 자격을 얻기 위한 중요한 시험과 인터뷰를 마치고 승인이 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하게 될 연구에 대한 기획안을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드디어 박사과정의 중요한 반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준하에게 연락을 하리라. 학교에서의 바쁜 시간들은 앞으로 올 시간을 제대로 맞으려는 희서에게 에너지바 같은 역할을 했다.
누가 봐도 밝아진 표정과 분위기는 같이 팀프로젝트를 했던 Reis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신사적이고 관대한 사람으로 평이 나 있었지만 희서에겐 그저 또라이 변태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