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by 수의서재

누군가에게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관계에 있어 비정상적인 상상력을 부추기는 금기와 같은 것이었다. 희서에게 남녀 사이에 대한 어떤 교훈을 주려는 시도 자체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도 되돌릴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녀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얼룩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희서에게 중학교 때부터 보여주었던 여자 어른들이 웃음을 흘리거나 눈물을 흘리며 희서 꿈속에 나타나는 날에는 영낙없이 오한에 떨며 온종일 아프곤 했다. 눈마저 뜨거워지면 곧 뿌옇게 변하는 시야 때문에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었다.


팀프로젝트는 네 명씩 한 조가 되어 미국 이민자 아이들의 새로운 언어 학습 과정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데이터를 모아 새로운 언어 습득 모델을 최종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조사와 연구분석을 각각 3개월씩 진행해 총 6개월 동안 한국의 한 학기 프로젝트처럼 진행되었다.


Reis는 전직 모델이었다고 했다. 큰 키에 걷는 모습 하나로도 지나가는 학생들의 눈길을 끌곤 했는데 스스로도 그런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보여서 희서에게는 경계 대상이었다. 당연한 듯 왕자나 되는 양 대우받으려는 잘생긴 것들의 뻔뻔한 태도가 눈에 보이면 속이 울렁거리며 아버지가 생각났다.


인터뷰도 제대로 못하고 보고서도 제대로 작성하지 못했다. 팀원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눈웃음 지으며 입발린 말 몇 마디로 순간을 잘 모면하곤 했던 Reis는 희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어서 프로젝트가 끝나길 바라며 그가 해야 할 것까지 떠맡아 힘겹게 보내던 그 가을에 핼러윈 축제가 있었다. 유일하게 학기 중 숨통을 돌리며 술 한잔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술이 있는 행사에는 어김없이 한편에 경찰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 경찰 복장조차도 핼러윈을 즐기는 것처럼 즐겁게 농담하며 보낼 수 있는 짧은 여유지만 최고로 흥분되는 축제였다.


술이 벌써 꽤 들어갔는지 비틀거리며 다가온 Reis가 잠깐 오라는 손짓을 따라가 보니 여자 아이 하나가 술에 취해 음악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여자친구라 했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 서로 인사를 하고 재밌게 보내라 돌아서는데 Reis가 희서의 어깨를 세게 잡아 멈추고는 몸은 자기 여자친구에게 돌려 키스를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희서의 눈앞에서 폭력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술에 취한 세상이 그의 끊긴 필름 속에 저장되었지만 그 초현실의 순간은 미국에서의 희서의 최악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가 잡았던 한쪽 어깨가 아버지의 얼룩으로 오염된 것 같았다. 잡았던 힘이 얼마간 그대로 느껴져 몸서리를 치곤 했다.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혐오했다. 희서의 눈을 통해 기억에 가라앉은 아버지의 의도된 여자들과의 접촉들이 절대 그 누구와도 닿아서는 안된다고 악마처럼 따라다니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런 걸 원했던 걸까. 극도의 결벽증은 아버지가 희서에게 남긴 유산이 되어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Reis가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그런 위태로운 상황을 즐기는 그를 여자 친구가 알아차렸을 거라고 짐작했다.


희서는 비슷한 상황을 한 번 더 경험했다. 그는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기면 파티를 한다며 같이 팀프로젝트를 했던 멤버들을 집으로 초대하곤 했는데 희서도 딱 한 번 팀원들이 모두 모였던 그의 집에서 그의 새 여자 친구를 만났다. 여전히 키 크고 늘씬하고 예쁜 여자 아이였다.


웃고 떠들며 저녁을 먹다가 식탁 아래 희서의 종아리를 타고 오르는 Reis의 발을 느끼고는 벌떡 일어났다. 옆에 앉은 여자 친구의 어깨를 감싼 손이 태연한 채였다. 극도의 당황에 가야겠다고 급히 나오는데 그가 따라 나와 희서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며 잡았다.


"Stay with me, please!"


희서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상황이 다시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곳에서 희서가 같이 있으면 좋겠다 말하는 저 의도가 뭔지 몰랐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Pervert! Hopeless! Fu...."


있는 대로 저주를 퍼붓고 싶었지만 아는 영어 욕이 별로 없었다. '변태!' '구제불능!' 그리고 희서가 아는 가장 심한 욕을 하려다가 밖으로 뛰어나와 구토를 했다. 변태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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