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 있는 부조리극의 순간이 어어준 '지금, 데미안'
뱃속에 잔뜩 낀 기름기를 털어버리려 누군가 취소해 비어버린 자리를 채우고 새로 시작한다. '시. 작. '이라 또박또박 마음에 새기기도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에 멈칫, 그 공간에 퍼지는 말을 주워왔다.
안간힘을 다해 벗으려는 신발 장면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다 닳아빠진 신발을 신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게걸스레 담으려는 군상들의 이미지가 겹쳤다. 어쩌면 사무엘 베게트는 떼내는 것, 거리를 두려는 것, 자유를 갈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착하며 놓지 못하는 것이 아프다. 떼내어 거리를 두고 자유를 원하는 그 길에 버티지 못하도록 백지의 디폴트를 꿈꾸지만 불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그것이 아마도 싱클레어의 향수였을 것이고 에바 부인의 위로였을 것이다. 데미안을 다시 읽을 때마다 에바 부인이 내게 와 같이 선다. 에바는 나의 갈망, 궁극, 불가능이다.
'비가역성...' 그 작가의 그 말이 나를 그 자리에 오래 서있게 했다.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것을 아니라고 괜한 주먹을 쥔다. 기다림과 그리움의 끝은 가역이 가능한 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반대의 '비'로 넘어가는 찰나일 것이다. 그뿐이래도 나는 '비'에 내 무게를 실어 흔들고 싶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와 에바부인은 현실과 이상의 양가적 차원이다. 속물적이거나 이상적으로 혼재된 감정을 지나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표식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도록 이끌어 준다.
'지금'이라는 외침이 연극 속에서 터져 나올 때마다 나는 데미안의 별을 사랑한 청년을 떠올렸다. 그의 부서짐은 나의 부서짐이기도 했다. 아팠다. 그는 그 '지금'을 믿지 않았으므로. 닿을 수 있는 그 길을 의심했으므로. 알껍질을 깨려는 산산조각으로 본다면 이미 다다르게 되어 사라진 청년의 그 껍질을 보는 것이다. 거기까지 가지 못한 그 청년의 이야기를 에바 부인이 길을 내준다. 그 '찰나'를 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쏟아지는 별처럼 무수한 데미안의 후기를 항상 꼼꼼하게 읽는다. 어쩌면 치밀하게 분석한다. 내 삶에 항상 펼쳐둔 어느 페이지에도 나는 헤르만 헤세가 쓴 글자수보다 더 많은 글자수로 엎어질 수 있다. 그러니 데미안이라는 말만 들어도 보아도 물고 뜯고 늘어지고 물구나무서서 바라보며 눈을 흘긴다.
출판사로부터의 정보로 가득 채우거나 이곳저곳에서 베껴다 쌓아둔 후기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딱 한번 읽고 꾸깃! 계속 다시 돌아가 읽도록 만드는 후기를 갈증 하다 만난 그 작가가 던진 데미안과 싱클레어 에바부인 헤르만 헤세 관계 갈증 얽힘 깨어남 사라짐 멈춤... 그들의 교차로에서 내 길을 찾는다. 수직의 핵심 가치로부터 아름답게 퍼지는 수평의 조근조근한 잔물결들, 이따금씩 돌아가 위안을 얻을 것이다.
나는 책이든 영화든 변두리 산길에서 발길질을 하며 걷다가 화락 마음을 깨우는 듯한 한 순간에 집착한다. AI의 노동으로 해결되는 정보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 너머를 보는 희열에 나를 바친다. 뒤통수를 번쩍 얻어맞고 며칠 앓다가 흠뻑 흘린 땀을 벗어나 초기화된 것 같이 가장 순수한 그 순간이 나를 살린다. 아프고 싶다.
부조리한 몸짓과 단어와 호흡에 휘말려 있다가 예술을 위한 망각을 피 토하듯 외치는 그 부랑자의 입에서 가야 할 방향을 읽는다. 망각 후 아무런 것도 딛지 않고 새롭게 쓰는 시, 가진 모든 것의 파산이 있어야 시(詩)를 제대로 쓴다는 1960년대의 김수영 시인의 한마디와도 관통하는 허름한 부랑자의 말을 눈물로 씹는다.
우린, 나는, 그리고 아마도 당신도 이 세상의 결핍이 무언지에 도대체 관심 없고, 게걸스럽게 가증스럽게 구걸하며 유혹하며 퇴폐와 유혹의 쓰레기 더미에서 고상한 척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사진을 볼 때마다 더 말라가는 것 같다. 젓가락 같은 그의 몸통과 세상이 필요한 가치가 반비례하는 건 아닐까 가슴 철렁한다. 그가 마를수록 필요한 가치가 켜켜이 쌓여 무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서로를 죽이고 삼키고 마시고 태운다.
부조리극을 조리 있게 만들어 '13세 입장 가능' 연극까진 좋다.
TV에서 본 얼굴들이 포진해 만석이 된 추석 맞이 연극까지도 괜찮다.
클릭 잘못해서 25%의 어마어마한 할인을 못 받고 들어간 것까지도 나쁘진 않다.
문해력 높은 13세 아이들이 많이 왔길 바랐던 내 희망이 수포로 무너져 내려 많이 슬펐다.
인기에 영합한 얼굴과 목소리보다 낯선 그 배우로부터 나오는 예술과 삶에 대한 태도가 생생하다.
발행하려는 찰나 아래쪽에 공백포함 불포함 글자수 표시에 브런치가 쌩불통이 아니란 걸 알고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