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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무자비한 고독

[영화] 프랑켄슈타인 by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2025

by 희수공원

사라지지 않을까 봐 끝나지 않을까 봐 자비를 구하지만 되풀이되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다. 피조물 안에서 오열하며 아프다.


지적으로 눈을 뜨며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시작된 건지 기억을 찾아 나서는 피조물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이다. 늦기 전에 떠나야 한다.


단순한 공포의 시작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정신적인 고통의 서사다. 이어 붙인 상처마다 붉은 피가 흐르고 시간은 물리적 상처를 아물리지만 딱지가 떨어진다고 모든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 흐르는 심장 세포의 너덜하게 뜯어진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묻으며, 죽어가는 숨소리를 바위에 내려 둔다. 하얀 드레스가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이다.


닿을 수 없는 갈증 속 순백의 러브스토리이기도 하다. 죽음이어야만 진실로 완벽하게 순수해지는.


버려진 시체 더미로부터 탄생한 그가, 더러운 범죄의 찌꺼기로부터 조각조각 꿰매어진 그가 할 수 있는 건 질문뿐이다. 나는 무엇인가. 왜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건가. 하지만 이내 보이지 않는 순수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에 잠시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긍정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오열하게 되는 자신의 시작을 어쩔 수 없다.


동반자를 얻는 것, 때로는 세상의 끝에 달린 금단의 열매를 따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힘들어도 공허하고 고독한 가슴을 채우려 해도 스스로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는 것, 그렇게 끄덕여야 하는 길을 택해야 하는 필연이다. 아니까 울부짖고 깨닫고 나서 스스로 고뇌를 재운다. 계속 살아내야 하는, 그것이다.


무책임한 창조에 대한 합당한 죄를 묻는 원작 소설과는 달리 단순한 공포물이기보다 인간적인 연민을 담은 절절한 휴머니즘의 서사다. 죽음으로부터 모자이크 된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심리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에 내 핏줄의 열기를 다 바쳤다. 그의 피가 솟을 때마다 내 동맥이 터질 듯 울렁거렸다.


공포나 복수가 아닌 인간의 감정과 숭고한 선택, 관계의 깊이와 아득한 공허에 대한 이야기다.


선택하지 않은 무자비한 삶에서도 살아내려는 희망을 바라보는, 고통으로부터 조합된 빅터,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채 한 발을 나아가야 하는 그에게서 계속 살아내야 한다는 슬픔을 새긴다.


인간 욕망의 피조물인 빅터가 느꼈을 그 거대한 외로움을 가슴에 안고 빅터가 간 그 길을 멍하니 바라본다. 눈보라 속 하얀 눈물을 훔치며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디로 떠나야 할까.


오직 괴물들만이 신의 위치를 탐낸다(Only monsters play God)는 건 오만한 욕망의 인간에게 주는 경고이며 그 창조의 주체가 되려는 인간이 어쩌면 괴물일 것이라는 메타포다.


죽음으로 끝을 맺지 못하도록 되풀이되는 형벌이, 창조자인 빅터가 아닌 피조물인 빅터에게 내린 건, 너무나 잔인하다. 죽으며 용서받고 자유로워지고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끊임없이 살아야 한다. 스스로 해방되는 길은 대체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스스로의 처분이 아닌, 죽음을 신에게만 맡기는 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신의 월권이다. 가여운 빅터는 메멘토 모리를 꿈꿀 수 없는 불멸의 슬픈 영혼이다. 인간 대신 짊어진 혹독한 삶의 무게다, 끝날 것 같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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