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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선 Mar 14. 2024

3월 14일

그제 3월 12일

카밍아웃이랄까!


내가 성경은 신화로 뒤덮여있다고,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참사람 예수이라고, 교회의 교리들을 부정하며, 육체적 부활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페이스북에서 밝혔다.


이전에도 한 번 이런 글을 올렸다가, 이단 삼단 소리를 들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내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보기 보다는 다만 나를 멀리 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내렸지만, 좋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들을 읽으며 까칠하거나 혹은 인색한 나는 더는 "좋아요'를 누를 수 없게 되었고, 그런 글들을 읽는 게 힘들어 아예 페이스북 활동을 접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주 조금씩 깊이 생각하게 될 분들도 있지 않을까 하며 그대로 카밍아웃을 했다.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인 듯하다.

내가 그랬듯, 늘 내 글에 '좋아요'를 하던 분들에게서 반응이 없거나, 아주 조심스럽고 점잖게 댓글을 달았다.


깊이 생각하며 긴 호흡으로 읽고 써야겠다. 그렇게 내 생각을 다듬으며 천천히 내 길을 가야겠다.




조너선 색스는 인간이 저지른 첫 번째 죄, 그러니까 성경의 선악과, 즉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어떻게 나쁜 것이기에 금지했으며, 그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주는데, 나는 깊이 공감한다.


선과 악의 차이를 아는 건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바라셨을 것 아닌가? 그런 지식은  가장 높은 형태의 지식 아니겠는가?

어쨌든 하나님의 형상과 닮은 인간이라면 그 열매를 먹기 전이라도 그런 지식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니 해도 될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명령을 할 수 있는 존재이지 않는가.

그러니 분명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열매를 먹고 난 후의 결과는 참혹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열매를 먹고 나서 새로이 알게 된 지식은 무엇인가!


조너선 색스는 수치심 문화와 죄의식 문화의 차이를 들어 선악과를 먹고 나타난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난 현상이 무엇이 말해준다.


수치심 문화에서 최고의 가치는 명예이고,  죄의식 문화에서는 의로움이다. 수치심은 우리에 대한 타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스스로 자신이 나쁘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죄의식은 자신의 양심이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대로 살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타인지향적이며  조의식은 내면지향적인 것이다. 수치심에 대한  본능적 반응은 우리가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 또는 우리가 다를 곳에 있기늘 바라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죄의식은 휠씬 내면적인 것으로 남들의 눈과 무관하게 남들 눈과 상관없이 죄의식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외면, 수치심, 시각, 눈에 관한 것이라면 죄의식은 양심의 문제이며 어디든 따라다니며 양심의 소리를 듣는 귀와 관련된다.


선악과와 관련된 이 이야기의 핵심적 감정은 수치심이다.

유다이즘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귀에 들리는 하나님이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오경은 수치심의 문화가 아니라 죄의식의 문화의 가장 탁월한 본보기다. 죄의식은 남의 눈에 띄는 것과는  상관없이, 온통 양심, 즉 인간의 가슴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에덴 동산에 살았던 사람들의 죄는 그들의 귀를 따른 것이 아니라 눈을 따른 것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열매를 먹음으로 그들 역시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그들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들이 얻은 것은 수치심의 윤리였지 죄의식의 윤리가 아니었으며, 타인의 눈에 드러나는 것에 대한 윤리였지 양심의 윤리가 아니었다.

수치심의 문제에서의 규칙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순응이다. 사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회라는 집단의 가치를 내면화시키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이 그 가치들을 위반할 때 극심한 낭패감을 느끼며 명예와 체면을 잃게 되어 좌절한다.


유다이즘은 그런 도덕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순응하는 것에 순응하지 않는다.


성경의 윤리는 시대의 우상들, 세상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지혜, 시대정신, 정치적으로 옳은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떼거리 본능에 도전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스토리는 기독교의 교회가 가르치는 타락이나 원죄, 사과나 섹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는 거짓 자기와 참 자기로 설명 가능할 듯하다.

타인들의 기대가 아닌,  독특하게 부여받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그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삶!


양심의 소리, 내 내면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던지, 아니면 동료 인간에게 귀를 기울이던지 간에 우리는 영혼 속에 침묵을 창조할 능력과 훈련, 집중을 필요로 한다.

<매주 오경 읽기 강론>(조너선 색스

한국기독교연구소)31~37  참고.


그동안 침묵하지 못하고 많이 떠들었고, 긴 숨  대신 짧기만 한 호흡을 유지해왔다. 그런 가운데 복잡한 심정, 양가 감정으로 마음 속이 시끄럽기도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으며 그들이 보고 있는 바에 관해서 번민했다. <마음의 철학자>(클레어 칼라일|사월의 책)17.


케르케고르 역시  인정에 대한 희망과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에 관한 불안을 느껴야 했으며, 이는  세상 안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경험과 불가분한 것으로, 우리가 타인에게 노출되고 시선의 대상이 되며 판단된다는 감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누구든 영적  이상을 고수하며 살려고 노력할 때마다 부지불식 간에 어김없이 스며드는 타협과 타락으로부터 영적 이상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마음의 철학자> 20, 21 참고.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백치>의 미쉬킨 공작  역시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딜레마를 마주했으며, 그를 감당하는데 실패하고  결국은  백치로 돌아간 것 아닌가 싶다, 생각해본다.

글이 두서없다. 나 역시 이같은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어제는 카나다에서 나온 작은 오빠 부부와 용인에 사는 작은 언니 부부가 함께 왔다 갔다. 그야말로 멀리서 왔다. 께  식사하고 떠들며 웃었다.

집으로 거처로 돌아갈 때 주려고 기껏 도토리묵을 쒀났는데 깜박하고 보내지 못했다. 낭패였다.돌아간 후에는 남편과 함께 걷고 들어와 헐리우드 액션 영화를 봤다. 그야말로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인데, 나는 쉴 때 이런 영화를 보면서 쉰다.


며칠 전에는 영화 <와일드>를 그리고 또 그제는 <3일간의 휴가>를 시청하며 펑펑 울었고.

두 영화가 다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하는 두 딸들의 방황과 회복을 그렸다.

엄마들은 좋은 것만 기억한단다. 그러니 나쁜 건 다 잊고 자식은 편히 살길 바라는 그 마음. 딸과 엄마를 향한 내 마음이다. 엄마 내가 잘못해서 마음 아팠던 일일랑 다 잊어~

딸들아. 앞으로 나 죽은 담에, 나한테 잘못한 일로 행여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엄마들은 다 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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