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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음 Oct 27. 2023

되감기 시간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그는 모든 이야기가 고통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적당히 도톰하고 윤기가 흐르는 핑크브라운 빛 입술이었다. 우리는 거실에서 시간을 뛰어 넘은 사랑에 관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천 년 전 잃어버린 빵 부스러기를 찾는 것처럼 서로를 찾아 헤매는 여정을 비추는 영화였다. 오늘 서우가 온다고 했었다. 나는 자꾸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그는 내가 화장실에 들락날락하는 것도 잊을 만큼 영화에 몰입한 척했다. 영화의 품위를 남김없이 자신의 것으로 취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영화 말미에 서우가 왔다. 영화 곧 끝나. 목소리의 품위. 서우는 그의 뒤쪽에서 팔을 둘러 그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모든 이야기는 고통에서 시작한다. 나는 서우를 사랑하고 서우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서우와 나를 사랑하거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잊고 싶고 잊을까 봐 두렵다. 서우는 아름답고 그는 고통을 모른다. 나는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찰랑이는 물 위에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곧 들려올 외마디 비명은 그의 것이다. 서우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다. 너를 잃어버릴 거야. 나는 나의 이야기에 흠칫 놀라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미동 없이 엎어져 있었다. 서우는 차분히 그가 있던 자리에서 그와 비슷한 포즈로 앉아 영화를 되감고 또 되감았다. 모든 이야기는 고통에서 시작한대. 잃어버릴 거야. 잃고 미친 듯이 찾아 헤맬 거야. 서우가 말했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의 찰랑이는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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