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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때만 못합니다

by honest

지금도 내가 첫 회사의 상사분들과 계속 연락하며 지내는 까닭은, 불과 2년도 안 된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내게 그만큼의 애정을 주었고 또 인정을 보냈기 때문이다. 물론 첫 회사에서 오는 애틋함도 있겠지만, 나는 도리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비교 대상이 없는 첫 회사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매몰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장점보다는 단점만 부각되는 게 사람의 본성 아니겠는가. 넘치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고 늘 인정받았다. 그래서 그 회사를 다니면서 '이 회사엔 네가 아깝다', '넌 어쩌다 이 회사를 들어오게 됐냐'는 상사분들의 질문도 있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난 그 회사를 대학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회생활을 경험해 보는 징검다리 정도로 여겼기에 그럭저럭 대기업이고 이름도 한 번 들어본 정도의 회사라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공채였지만 나를 위해 면접 날짜를 변경해 준 점도 무척 고마워서, 다른 회사를 지원할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수많은 교수들과 알고 지내는 나로서는, 사람이 학업을 하기 전에 만원 지하철도 타보고, 남들에게 무시도 당해가며, 공휴일의 소중함도 느끼고, 어쩔 수 없는 술자리에도 참석해야 하는 직장생활은 역시나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 느낀다. 다만 내 경우엔 그게 독이 되었는데, 정작 대학원으로 돌아가서도 '여기에서 반드시 승부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도리어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다 안 되면 다시 취직하지 뭐' 이런 생각으로 돌아간 대학원에서,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현학적인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보면 '이게 뭐하자는 건가', '이건 정말 사람들의 삶에 중요하긴 한가' 이런 회의가 많이 들었고 마침내 나는 복학 2년이 채 안 되어 다시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붙이면, 나는 이런 게 내 최대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건, 첫 직장을 쉽게 관둔 건, 누구의 책임도 잘못도 아니다. 그냥 쉽게 포기하는 내 성격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면서 난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첫 회사를 한 번에 취업한 나였다. 내 사수는 거의 모든 회사에 떨어지고 한 군데 회사에 붙어서 취업했다고 말해 주었었는데, 난 그 반대였기에 두 번째 취업 준비는 몇 군데에 떨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은 했지만 한 군데도 붙지 못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난 중고신입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 위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단점이 있는데, 내가 들어갔던 첫 회사 동기들 가운데에는 중고신입이 많았다. 아무래도 회사 입장에서는 바로 현업에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을 보지 않았을까 싶고, 나도 면접에서 실제로 다른 기업체 정직원으로 다녀본 적은 없지만 수많은 경력사항을 들며 나는 중고신입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어필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진짜 중고신입이 된 셈이었다. 10년도 더 전이지만 어느 회사를 넣든 쉽게 갈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여러 군데를 붙는다면 어디를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 좋소기업을 다니고 있는 내 현실이 알려주듯이 나는 보기 좋게 모든 회사에서 탈락했다. 면접까지 갔던 회사도 있었지만 도리어 중고신입이라는 경력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들었는데,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중고신입의 경우에는 뽑아도 다시 또 금방 그만둘 수도 있다는 점이 고려된다고 한다. 더불어 내가 다녔던 회사도 작은 회사는 아니었기에 새로 입사 신청을 한 회사들에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우리 회사보다 더 좋은 회사인 것 같은데 왜 거길 그만두고 여길 이제와서 다시 입사하겠단 거에요?' 나름대로 그 부분이 핵심이 될 것 같아서 나는 답변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면접관을 만족시킬 정도는 되지 못했지 싶다. 다행히 내 인생은 항상 솟아날 작은 구멍 정도는 있었던 덕분에 예전에 일하던 곳의 아는 분이 자리가 비었다며 들어오라고 내게 기회를 주셨고, 그 회사를 거쳐서 그 회사보다는 조금 더 큰 회사로 옮겨 다니고 있는 게 지금의 내 현실이다. (TMI입니다.)


재취업이 잘 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을 때, 첫 회사 동기형과 만나 신세한탄을 했다. '형, 나는 형이랑 달라서(그 상황에서 잘난 척은) 한 번에 취업도 했는데, 왜 지금은 취업이 안 되는 걸까. 이제 경력도 있고 오히려 더 잘 될 줄 알았는데. 이번엔 지원도 여러 군데 했는데'. 그러자 그 형이 이야기해 주었다. '야~ 당연히 다르지. 그때 너는 막 전역한 스물여덟 젊은이였고, 너 진짜 그때는 우리 회사가 아니라 다른 회사 어디라도 냈으면 뽑아 갔을 걸? 그런데 지금은 나이도 서른한 살이고, 중간에 대학원 다닌 것도 애매하잖아. 당연히 그때랑은 다르지. 그때였으면 너 지금 지원한 회사들에 거의 다 됐을 걸?'




솔직하게 욕 먹을 이야기 좀 해야겠다. 브런치만 보면 나는 여전히 아내를 잊지 못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것 같지만 결코 아니다.(;;;) 아마 아내는 그런 내 마음을 진작에 알았을텐데, 성가대에 들어간 것도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지금은 아예 포기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기대를 품고 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상당히 까다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한번 실패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지독하게도 많은 것을 따지는 나인데, 그 와중에 또 '다신 없을 사랑'을 하고 싶다는 환상까지 추가하고 나면 솔직히 내가 정말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다. 그런 회의가 들 때가 가장 힘들고 외롭고 또 괴롭고, 그런 상태일 때 아내 생각이 정말 많이 난다.


나는 아내와 서른넷에 만나 마흔둘에 헤어졌다. (우린 동갑이었다.) 그땐 나도 젊었고 아내도 젊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는 아내가 아니라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나이도 많지 않았고 그렇게 나쁜 조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차저차해서 결국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고 하필 우리는 결혼에 실패하고 말았다.


정말 우스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걸 아는데, 항상 '본전 생각'이 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이런 말을 갖다 붙이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아내만 못한 사람을 만난다면, 아내와 헤어진 것을 더더욱 후회하고 계속 자책하고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사람을 이렇게 비교한다는 게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얼마전에 다른 다녀온 지인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정말 죄송한데, 그런데 솔직한 말씀 좀 드려도 될까요? 기분 나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뇨, 얼마든지 하세요. 그래야 저도 정신 차리죠'. '솔직히 honest님은 예전 그때처럼 좋은 조건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결혼하실 때보다 더 나빠졌음 나빠졌지 좋아졌다고 할 순 없는 거.. 아시잖아요'


뭐, 다 알고 있는 상황이어서 별로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고. 물론 나는 지인에게 답변으로 나의 솔직한 심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지인도 아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거다.(아니려나?) 어쨌든 오늘의 나는 그때의 나만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리석게도 그때의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고 있다.




나의 이상형은 '현명한 사람'인데 나는 아내와 헤어지면서 스스로가 훨씬 더 많이 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큰 어려움과 난관을 지나왔으니 어쩔 수 없이 현명해질 수 있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데 나이가 든 것과는 또 별개로 사람이 '어떠어떠해서 헤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많은 부분을 깨달았다. 당연히 내 잘못이 많고 그래서 나는 '아내만한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겠지'라는 생각에서 우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는 천사였고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이었던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이런이런 점이 부딪치지 않아야 헤어지지 않을텐데'라는 생각에 이르고 나면, 서른네 살 때도 세상 까다로워서 결혼하기 힘들 것 같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난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결론에 미치면 이루 우울하기가 말할 데가 없다. (그리고 그럴 때면 아내가 엄청 그리워진다.)


물론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예측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내를 소개받았을 때, 그 자리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고, 아내를 만나면서도 생각보다 독실했던 아내의 종교관 때문에 여러 차례 망설이기도 했었다. (종교관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저찌하다 보니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어영부영 결혼한 탓에 헤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다시 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 그런데 이제는 '어영부영하진 않아야 한다'는 다짐을 덧붙이는 내 모습을 보면서, 역시 과거의 나보다도 지금의 내가 더 어렵고,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해가 쨍쨍한 지금도 다시 또 깊이 우울해진다.


늘 생각하는 것이 분명 내게 전생은 없을 것이다. 어쩜 이렇게 처음 살아본 티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였다면 좀 더 잘했을텐데. 아니 좀 덜 못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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