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으로 오기까지는

by honest

나를 받아 준 순천에는 미안하지만 내 모든 것을 공개하는 브런치이니 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해야겠다.




가을 한 달 살이의 1순위 지역은 해남이었다. 해남에도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그 이유를 말한다면, 해남이 1순위였던 까닭은 아는 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서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해남은 한 달 살이가 아니라 두 달 살이였다. 뽑히지도 않았지만 그 점은 조금 부담이었다. 회사를 다니고 있는 입장에서(아무리 승포자라고 해도) 한 달이라는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두 달은 정말 만만치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해남은 두 달 살이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프로그램 일정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확실히 뽑힐 거라 생각했기에 한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뽑힐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두 달을 무난하게 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마침 또 지난주 토요일에는 우리 성가대의 정기연주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노래를 프로급으로 잘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연습에도 열심히 참여해야 했는데 두 개의 일정을 어떻게 조화롭게 만들어야 하나 달력을 보고 또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는 탈락이었다. 한 며칠은 그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당연히 될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렇게 허비한 며칠이 너무 아깝다. 그 며칠 사이에 좋은 지자체의 한 달 살이 프로그램이 많이 마감되었다. 나는 정말 한 달 살이를 하고 싶은가, 그건 정말 꼭 해야 하는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에서부터 낙방의 충격에서 벗어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나서 하동, 진주에 차례차례 지원을 했고 지금 순천에 와 있는 내 처지가 알려주듯 나는 보기 좋게 모든 곳에 떨어졌다. 하동군과 진주시에 떨어졌을 때도 마찬가지로 좀 충격이 있었다. 하동의 경우에는 오랜만에 지원서를 성의껏 작성했기 때문이었고, 진주시는 바다도 면해 있지 않은데 '설마 여기 안 되겠어?'라는 마음으로 지원했던 탓이다. 특히 나는 석사논문을 임진왜란을 주제로 작성해서 진주는 이 정도면 나와 연관이 꽤 있는 터라 무난하게 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다 탈락이었다.


이때부터는 자비로 한 달 살기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게 해도 상관없었다. 대개의 경우 한 달 살이 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 하더라도 거의 숙박비 위주의 지원이었는데, 내가 한 달 동안 숙소를 빌린다고 해도 80에서 많아야 100만 원 정도라는 계산이 섰다. 내가 그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더구나 자비로 한 달 살기를 하면 정부 지원금을 받았을 때와 비교해 서류 작성, 영수증 붙이기 들들 수많은 잡무에서 벗어나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도 또 메리트였다. 작년 1월에 여수 한 달 살이를 알아볼 때도 자비로 할 생각이었고, 자비로 한 달 살이를 한다면 내가 가고 싶은 지역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게 조금은 한 달 살이 프로그램에 뽑히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을 때쯤.


내게 순천이 왔다.




순천은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 도시다. 바다와 산을 다 접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먹을거리며 볼거리, 할거리가 모두 넘치는 도시다. 그럼에도 나는 순천에서 한 달 살이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순천은 엄청나게 인기가 많은 도시다. 지자체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한 달 살이 프로그램의 경우, 전남에서 여수와 순천, 목포와 같은 도시는 선정될 거라는 기대를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 지원자가 너무 많고 그만큼 SNS 인플루언서들의 벽을 넘어서기 어렵다. 게다가 지원자가 너무 많은 까닭에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내가 알기로 여수와 순천은 누군가를 한 달씩 뽑아 주지 않는다.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가 지원금의 한계라고 들었다. 처음 해남을 생각했던 것도 바로 이런 여건 때문이었다. 그래도 해남은 '군'이다. 여수, 순천, 목포만큼 인기는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1, 2년 전만 해도 해남 정도는 합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 나는 한 달 살이를 할 때 가 보지 않은 고장을 방문하는 걸 또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이왕 가 보는 거 가 보지 못했던 곳에 가서 지내는 게 하루이틀이라도 경험치를 더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순천을 세 번이나 와 보았다. 대학교 2학년 때 지리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순천에서 1박을 했고, 선암사 템플스테이를 가는 길에 순천에 들렀다. 그리고 아마도 7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또 순천에서 1박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게는 이번이 순천의 네 번째 방문에 해당하는데,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여수와 하동과 비교했을 때, 이미 세 번이나 가 보았다는 점에서 순천을 고려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하동에 이어 진주까지 모두 탈락한 뒤, 순천 한 달 살이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무척이나 마침맞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게 일정이었다. 성가대 연주회도 내가 고려하는 주요한 일정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번 순천 한 달 살이는 성가대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시작하는 일정으로 되어 있었다. 토요일에 성가대 연주회를 하고, 그다음 월요일부터 순천 한 달 살이가 시작하였다. 물론 한 일주일 정도는 여유를 가지고 나도 회사 일도 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좀 더 뒤에 시작했더라면 더 좋았겠지 하는 마음이야 어찌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건 95점짜리 공고문을 보고 왜 100점이 아니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우선 성가대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시작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메리트였다.


또 순천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적당한 규모의 도시였다. 해남을 지원했던 것도, 지나면서 1박 했던 해남의 읍내 규모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규모는 중요하다. 도시규모가 너무 작으면 생활이 불편하다. 순천은 그런 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적당한 규모의 도시였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전남에서 순천이 가장 큰 도시이지 않을까. 목포나 나주보다 순천이 클 것 같다.(광주는 독립된 광역시라 제외하고) 내 고향과 비슷한 규모를 가진 도시였다. 시내에 적당한 운동시설도 있고, 또 승마장도 몇 곳 갖추고 있는 데다 시내에서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이 정도면 한 달을 보내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이 점도 매우 중요했는데 지금 내가 시작한 한 달 살이는 1년에 세 차례 시청에서 공고를 내어 여행지원금을 지원하는 그런 한 달 살이가 아니다. 시에서 목적을 가지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일정이 모두 짜여 있고, 또 숙소도 정해져 있다. 어떤 점에서는 이런 면이 매우 불편하겠지만 내게는 이 또한 무척 마음에 들었다. 24시간이 자유시간인 것보다 하루에 5~6시간이라도 프로그램이 있어 적당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좋다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프로그램을 함께하게 되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도 교류할 수 있다. 아예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생소한 도시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의지할 사람들이 있는 쪽을 나는 더 선호한다. 더구나 숙소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실은 이건 이 프로그램의 엄청난 마이너스 요소다.) 지원금을 받으면 내가 숙소를 찾아야 하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수증이 발급되는 숙소면 되었지만 이제는 숙박업으로 등록하지 않은 숙소는 안 된다. 나는 3년 전에 통영에서 한 달 살이를 할 때도(그때는 지원금을 받지는 못했지만) 숙박업 등록을 하지 않은 에어비앤비까지 지원금을 지원해 주는 건 조금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게 바로잡힌 것이다. 다만 이건 여행객에겐 조금 불편하다. 지금의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등록된 에어비앤비 숙소 중에 80% 이상이 미등록이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숙소를 구해서 정해 주는 쪽이 훨씬 편하다고 보았는데 이번 프로그램은 이 점까지도 안성맞춤이었다.


일정이 정해져 있는 프로그램인 덕분에 자세한 여행 계획서를 쓸 일도 없었고, 정해져 있는 양식의 질문에만 충실하게 답변하면 되었다. 심지어 글자 수마저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나는 글자 수는 넘치게 쓸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지자체의 한 달 살이 프로그램에 선정된 프로 선정러들처럼 수십 장의 PPT를 만들 자신까지는 없었기에 이 정도면 내게 충분히 유리한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지원서를 쓰면서 나와 순천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써 나갔던 게 떠오른다. 실제로도 대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순천 사람들과 깊은 유대가 있었다. 순천 출신 형 한 명과 여자 후배 한 명이 유난히 친했는데, 같은 수도권이 아닌 지역 출신이라는 공통점에다 비평준화 고교를 나왔다는 동질감까지 더해졌던 까닭이다. 지원서의 기타 란에 그런 순천과의 인연도 일필휘지로 써 내려 갔던 게 기억난다.(그런데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순천 출신 형에게 잘못 썼다며 혼났다.)


지원서를 다 작성하고 나서 이 프로그램에 대해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에 뒤늦게 지난 차수는 경쟁률이 무려 26대 1이나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바람에 한동안은 매일 접수자를 확인하면서 걱정도 상당히 했다. 그런데 숙소 문제일까, 아니면 방학이라는 메리트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지난 차수의 경쟁률은 26대 1이었는데, 이번에는 지원자가 26명 수준이었다.(실제로는 그보단 좀 더 많다.) 지원자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부터는 거의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양양 프로그램도 20명 선발에 100명 내외로 지원했는데 뽑혔던 경험이 있기에, 내심 5대 1 이하의 경쟁률이라면 충분히 선발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순천으로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