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인양 하여

순천에서 잠긴 추억

by honest

어쩌면 여수보다는 순천일텐데. 처음에 왜 순천을 일순위로 떠올리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다. 순천은 세 번이나 다녀갔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중 한 번은 아내와 함께였다. 고작 1박일 뿐이었지만, 분명 나는 그 기억이 떠오를까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목요일엔 시내를 걷다가 아내와 함께 갔던 식당의 풍경을 보았다. 10년도 더 전에 혼자 다녀갔던 식당이었는데 너무도 마음에 들어 다시 순천을 찾았을 때 아내와 같이 가게 되었다. 다시 찾은 식당은 처음 같지 않았지만, 식당의 간판 아래로 저 아래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나와 아내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어제는 순천의 상징과도 같은 순천만국가정원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다. 몰랐는데 이번에 알았다. 아, 나도 아내와 함께 동문으로 입장했었구나.(정원이 큰 만큼 문도 여러 곳 있다.)


벌써 7년도 더 전의 일이니 그새 순천만국가정원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을 터다. 그러나 없던 정원을 새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큰 풍경은 대동소이했고, 언덕과 호수 또한 그대로였다. 그날도 지금처럼 날씨가 무척 좋았는데. 아, 물론 그때는 봄이었던 것 같다. 이왕 이야기를 하는 김에 좀 더 말을 풀어본다. 지금도 그런데 나는 휴가를 갈 때면 회사의 전원 코드를 내리고 온다. 인터넷전화라 그렇게 되면 전화 연결이 안 되는데, 그때도 그랬던 모양이다. 런데 순천에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분명 다급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 일을 맡긴 의뢰인이 아니라, 그 의뢰인의 조수의 연락이었다. 자신의 상관이 지금 나와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서 매우 화가 나 있다며 내게 전화 한 번 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였다. 무슨 소리야. 나는 지금 휴간데. 분명히 휴가라고 말했지만 그 조수의 목소리는 정말 간절하였다. 나는 그 의뢰인의 성정을 잘 알기에 조수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휴가 중이지만 그냥 전화 한 번 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의뢰인과 무사히 통화를 마쳤던 기억이 난다. 아내가 그걸 옆에서 다 쳐다보고 있었던 기억도. 아무래도 의뢰인과 나도 갑과 을의 위치이다 보니 전화하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내는 내게 프로 직장인 같았다며 추켜 세워 주었다. 그렇게 그 해프닝은 별일 없이 끝났다. 그 의뢰인과의 일은 잘 되었냐고? 다행히 무사히 마무리했다. 다른 사고도 있었지만. 그 의뢰인은 사람이 되지 못한 동물이라서 한 번은 내게도 대놓고 갑질을 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honest 아닌가. 나는 그 의뢰인에게 내가 메일을 보냈던 날짜와 시간, 그 의뢰인이 메일을 확인한 날짜와 시간까지 모두 확인해 가며 맞섰다. 물론 그렇다고 사과할 양반은 아니었고, 덕분에 욕은 먹지 않고 무사히 일을 마쳤던 기억이 난다. 업무와 관련해 나는 중요한 메일과 문자 들은 지금도 보관하는 습관을 유지 중이다.


맑은날 햇살을 만끽하며 아내와 정원을 걸었었다. 7년 하고도 반년이 지나 정원을 거닐다 보니 그때의 그 풍광이 그대로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때는 정말 좋았는데. 그때는 정말 행복했는데. 함께 순천 한 달 살이를 하는 일행들이 함께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나 혼자라는 생각에 깊이 잠기게 되었고 기분이 절로 가라앉았다. 정원에 있는 동안에는 내내 그랬던 것 같다.


어떤 사람과 만날 때도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도 상담을 하실 때면 내 기억력에 엄청나게 놀라신다. 모르겠다. 나는 평생을 이러고 살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나은 기억력이 뭐 공부하거나 이럴 땐 도움이 되었겠지만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깊이 생각하면서 살지 않았다. 기억력이 좋다는 건 아마도 장점이겠지. 그러나 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억력이 너무 좋다 보니 적당히 시간이 흐르면 망각해야 할 어떤 일들도 내게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아내와 같이 순천만정원에 왔었지. 그리고 그날 순천만정원을 구경하고, 우리는 시내에서 꼬막정식을 파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아마 저녁 6시 반쯤이었던가. 그때쯤 서울로 출발하려고 차에 탔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일일이 구체적으로 지난날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던가. 일요일에 순천에 도착해서 월요일에 떠났던 것까지 모조리 생각이 난다. 그래서 그 의뢰인의 조수에게 휴가를 오래 쓴 것도 아니고, 고작 하루 쓴 건데 다음 날 가서 연락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던 것마저.


장점이겠지. 좋은 점일 것이다. 그러나 단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사람이 승자이듯, 장점도 늘 장점일 수는 없다. 그래서 아마 선인도 이야기하였나 보다. '다정도 병인양 하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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