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중에 가장 J가 사는 법
순천 한 달 살이에서 다른 사람들과 내가 가장 차별화되는 점을 두 가지 꼽는다면 하나는 퇴사 여부, 또 하나는 지인 유무일 것이다. 나를 제외한 9명의 사람은 모두 직장을 다니지 않고 쉬고 있다. 그래서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더니 다들 '어떻게 한 달이나 쉴 수 있어요?'라며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또 내게는 전국 각지에 분포해 있는 지인들이 있다. 그제는 진주에 가서 아는 교수님을 만나고 왔고, 내일은 광주에 가서 선후배를 만나기로 되어 있다. 조금은 멀지만 사천, 통영 등지에도 아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데 이번 한 달 살이 동안 만나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엄청 꼼꼼하게 시간 단위, 분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편은 아닌 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나는 계획이 틀어지는 걸 매우 싫어하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회사가 잘 맞는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스개로 최고의 명강의는 '무단휴강'이란 말이 있었다. 나는 결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도 성인이고 다른 시간 계획이 있는데 휴강을 할 거라면 사전에 미리 말을 해 줘야지. 나는 무단휴강을 제일 싫어하는 학생이었고, 강의평가에서도 그 부분은 명확하게 평가했다. 요즘은 공휴일로 인한 수업 결손조차도 보강을 하도록 한다니 아마도 예전 같은 무단휴강은 거의 없어졌을 거다.
순천 한 달 살이는 내 맘대로 지내는 게 아니라 일정이 있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나는 사전에 시간 계획이 어떻게 잡혀 있는지가 매우 궁금했다. 처음에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휴식을 위해 진행하는 셈이니 일정을 그렇게 빡빡하게 하진 않을 거란 생각도 하긴 했지만, 가능하면 웬만한 프로그램은 모두 참석하는 쪽으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전에 출발하기 전부터 상세한 일정표를 좀 공지해 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주최 측에서는 도착하는 날 공지될 거라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2주차부터는 그렇다 쳐도 1주차 일정이라도 미리 안내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고, 결국 지난주에 이미 흘러간 이번 주 일정표는 받았다. 그리고 어제는 남은 3주의 일정에 대한 상세한 안내가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세상 일이 모두 다 그렇겠지만 참 다 내 맘 같지가 않다. 일정이 엄청 빡빡하지는 않다. 대체로 많아야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정도고 점심시간도 여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난 한 주를 지내보았더니 이게 또 만만치가 않다.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이라 해도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인 셈이라 생각보다 그렇게 한가하지가 못하다. 물론 회사에 다니거나 사회생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엥? 10시부터 4시까지가 여유롭지 않다고?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만약 회사에 10시에 출근해서 4시에 퇴근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한 번 떠올려보게 된다. 그런데 놀러온 사람의 입장은 또 다르다. 하루 중 해가 떠 있는 10시에서 4시까지의 일정을 붙잡혀 있다고 한다면 빡빡하지 않은 건 맞지만 다른 일정을 잡는 것도 수월하기만 한 건 아니다. 나는 순천에 머무는 동안 조계산 종주를 한 번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종주를 마치고 10시에 일정을 시작할 수 있나? 아니면 4시에 일정이 끝나고 종주를 시작한다면? 둘 다 매우 어려운 일정이다. 그래도 이건 괜찮다.
헛웃음이 나왔던 건 내가 계획했던 몇 가지 일정과 한 달 살이의 시간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오전에 일정이 있었으면 하는 날엔 꼭 오후에 일정이 있고, 반대로 내가 오전에 일정을 하고 오후에 다른 일을 보았으면 싶은 날에는 오후에 일정이 있었다. 정말이다. 아주 기가 막히게. 다른 일정은 잡지 못하도록 옴짝달싹 못하게. 물론 그건 개인 일정이고, 이건 전체 팀 일정이니 내가 단체에 맞추는 게 맞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사람이 뭔가 내게 잘 맞춰졌으면 하는 바람이 없을 수 없지 않은가. 그게 정반대로 뒤집혀서 헛웃음이 나왔던 셈이다.
그제 진주에 아는 교수님을 만나러 새벽같이 다녀왔다. 진주는 몇 번 가 보지도 못했고,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여서 이번에 간 김에 그래도 하루 정도는 시간을 빼서 구경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금요일엔 1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일정이 있어서 겨우 국립박물관 한 곳 보고, 교수님과 브런치만 함께하는 정도로 그쳤다. 실은 점심이 좋다시길래 목요일 점심에 만나자셔서 하루 정도는 시간을 빼고 진주를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주최 측에서 의외로 강경하게 그건 안 된다고 잘랐다. 나도 친목 자리 때문에 일정을 비우는 건 정당한 사유가 아닌 셈이라서 어쩔 수 없이 양보했고, 다행히 금요일엔 오전에 자유시간을 준다하여 그 교수님께 금요일 점심을 매우 일찍 먹는 쪽으로 양해를 구했다. 태어나서 10시 30분으로 점심약속을 잡아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정표를 받아 보니, 오후 3시에 시작하는 날도 허다했다. 헐. 아니 진작에 이 일정표를 줬다면 그제 그렇게 무리를 해서 점심약속을 잡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진주도 그렇게 무리해서 다녀오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괜히 헛웃음이 나온 게 아니었다. 내일은 또 어떤가. 이번 한 주 내내 4시에 일정이 끝났기에 그 일정 뒤로 광주에 선후배를 방문하는 쪽으로 기껏 약속을 잡았더니, 내일부터 이틀간은 아침 8시 30분에 일정을 시작해서 2시 30분에 일정을 마친다고 안내받았다. 아, 거 참 미리 얘기 좀 해 주지. 반면 목요일엔 여수에서 5시 반에 시작하는 행사가 있어 참여하려 했더니, 그날은 오후에만 일정이 있다. 2시 반에서 3시쯤 시작해서 6시에 끝나는 일정으로. 금요일엔 서울에 병원을 가기 위해 오후 중간에 나와야 하는데, 하필 금요일도 오후 2시 반부터 일정을 한단다. 나 원 참. 월화와 목금이 일정이 바뀌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연히 주최 측은 주최 측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 어쩌면 이 프로그램에 참여도 하면서 내 일상도 놓치지 않으려는 나의 두 마리 토끼 때문에 이런 불화가 생긴 것일지도 몰라서, 아니 거의 그게 확실해서 솔직히 나는 할 말이 없긴 하다.
회사를 다녀가는 일정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11월의 첫 이틀은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한 달 내내 쉴 수는 없어서, 2주를 쉬고 중간에 이틀은 나올 생각이었다. 지난번 회의 때 팀장에게 부탁해서 화요일에 있을 회의를 월요일로 옮겨달라고 하긴 했지만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받아야 할 서류도 보내는 쪽에서 월요일에 보내면 내가 화요일에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월요일에 받으려면 돌아오는 금요일에 부쳐야 해서 그쪽에서도 서류를 검토하는 기간이 사흘이나 줄어든다. 주말이 껴 있는 까닭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처음 공고문에는 선암사 방문 일정이 수요일로 되어 있었는데, 와서 받은 일정표는 화요일 방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 어쩌겠나. 일을 진행하다 보면 당연히 처음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아직 회사에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선암사는 웬만하면 방문하고 싶어, 중요한 회의지만 이번엔 빠져야 할 것 같다. 회사에 다음 달에 회의 안건으로 올리는 쪽으로 양해를 구하고. 다행히 서류를 보내주는 쪽에도 금요일에 부쳐달라고 부탁해 놓긴 했지만, 나도 서류를 이틀 볼 수 있는 걸 하루 안에 보아야 하는 터라서 쉽지 않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거의가 이렇다. 3주차 주말엔 고흥에서 하는 다른 프로그램이 있길래 여기까지 온 김에 신청해 두었는데, 하필 고흥에 도착해야 하는 금요일엔 또 오후에만 일정이 있다. 오전에 일정을 두면 안 되는 것인가. 고흥 프로그램은 3박 4일인데 월요일에는 오후에 일정이 있으면 좋으려면, 이건 또 오전부터 있다. 일정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다른 곳에 가지 못하도록 가능하면 금요일 오후까지 일정을 잡고, 월요일은 또 아침부터 일정을 시작하도록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렇게 해야 할 만도 하고. 이 지역 살리기라는 의도가 있는 일정이니 말이다. 그러면 지난번에 담당자가 주말에는 순천에만 머물지 말고 주변 지역도 다니라는 말은 또 뭔말인지.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 주변 지역까지는 괜찮은데 혹시 멀리 갈까 봐 그랬던 것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실은 내가 이 프로그램에만 집중하지 못하고, 사슴을 잡으며 토끼도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까닭이니 누구를 탓할 입장은 못 된다. 나말고 다른 사람들은 별 불만이 없기도 한 듯하고.
통영에서 지냈을 때처럼 이번에 순천에 내려와서도 매일매일 운동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마침 순천은 가까운 곳에 승마장도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주말 승마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승마를 쉰지 어느덧 거의 2년이 흘렀다. 승마는 주간(낮) 운동이다. 그런데 10시부터 4시까지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고 겨우 목요일 오후 늦게 승마장에 가서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처음 서울에서 보았을 때는 8회권과 15회권이 2배 가까이 탈 수 있는 시간이 차이 나는 반면에 요금은 1.5배 차이뿐이라서 웬만하면 15회를 타고 싶었다. 그런데 방문 날짜도 차일피일 미뤄졌고, 낮에는 이쪽 프로그램도 참여해야 해서 겨우 8회권만 등록하고 말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실은 8회조차도 다 탈 수 있을지 걱정이다. 통영에 있을 때 다녔던 승마장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영업했는데 이곳은 월화를 쉰다고 한다. 대체로 승마장이 월요일 하루만 쉬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그래도 이게 맞지. 그래 승마장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이틀을 쉬는 게 맞다.
이렇게저렇게 잘 바뀐다면 모두 내가 원하는 일정대로 잘 풀려나갈텐데. 세상 일이, 사람 일이 참 그렇게 내 맘대로 흘러가지가 않는다. 아쉬운 소리 하는 걸 매우 어려워하는 난데, 이제 시작하는 주에는 금요일과 그다음 월요일까지 일정을 전부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을 열 수 있을지 걱정이다. 무대포라고는 하지만, 회사에다가는 이번 화요일 회의에 참석하기 어렵다는 건 또 어떻게 전달한담. 월요일에 출근해서 이야기하면 너무 늦는데. 아예 휴가를 한 번에 한 달을 내어 버릴까 그랬나 싶기도 하다.
아, 세상 일 정말 참 계획대로 안 된다. 그래. 그게 계획대로 된다면 인생이 얼마나 수월하고 신나겠나. 벌써부터 내일 내게 주어진 과제에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