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혹시 나였던 것은 아닐까

단체 일정에서의 개인 일정

by honest

아무래도 나이가 큰 사람을 다루는 데서 오는 가장 큰 어려운 점은 머리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 어린 애들과 달리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자기의 주관과 판단이 강해지고, 임의로 결정을 내리기 시작한다. 돌다리를 한 번 더 두드려 보는 성향이라 해도 이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삶의 경험에서 오는 문제다. 나도 그렇다. 어느새 나도 머리가 커질 대로 커졌다. 커진 머리가 내 경우에는 지인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지난주에 이곳 담당자에게 두 차례 개인적으로 문의할 일이 있었다. 한 번은 이웃 도시로 아는 교수와 점심 약속 때문에 이곳의 일정을 빠져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고, 또 한 번은 주최 측을 통해서 선암사 스님에게 연락을 해 줄 수 있는지 여부였다. 12년 하고도 반년 전, 선암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3박 4일을 스님과 함께 보낸 적이 있다. 스님이 탐내시던 소설책을 선물로 드리고 온 기억도 난다. 이후에 선암사에 간 일이 한 번도 없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7, 8년 전쯤 아내와 같이 선암사를 찾았던 적이 있다. 그때도 스님께 한 번 연락이 닿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당일에 갑자기 만나뵙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한 번은 내게 '우리 집에 염주가 있었어?' 같은 질문을 던졌던 적도 있고. 가벼운 몸으로 온 이번에는 미리 말씀을 드리고 찾아뵐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두 가지 질문 다 주최 측에 의해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머리가 커진 나는 하나는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는 여전히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웃 도시 방문은 일정을 빠지면 안 된다며 거절당했다. 이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날 아침 10시 30분에 점심 약속을 잡았던 거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번 주나 다음 주에 점심 일정이 비는 날이 많다고 미리 얘기해 줬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첫 번째 사안은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 경우는 좀 다르다. 따로 나를 불러서 단체로 다니는데 개인적으로 왜 이리 일정이 많은지 물어왔다. 그러면 안 된다면서. 그냥 알았다고 하고 말았지만 이 부분은 도저히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사찰에서 스님을 만나는 건 단체 행동에서 일탈한 개인 일정이 아니다. 내가 받은 시간표에도 선암사에서의 자유시간이 적혀 있다. 그 시간에 스님을 만난다는 게 왜? 어쩌면 스님께서 그 시간이 어려우셔서 다른 시간에 만나야 할 수도 있다. 그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숙소로 복귀할 때 나만 남아야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왜? 어차피 숙소로 복귀해서는 자유시간이다. 나는 자유시간에 스님을 만나면 안 되는 것인가?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고, 나만 절에서 스님을 만나는 그림을. 어쩌면 그래서 안 된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모두 성인인데, 그런 건 바라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스님을 뵙는 바람에 복귀가 늦어진다면 알아서 버스를 타고 오면 되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어쨌든 선암사와 연락한 주최 측에서 강경하게 안 된다고 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따로 절에 전화를 해 볼 작정이다. 여전히 이 부분은 뭐가 문제인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게는 문제가 또 있다. 실은 이전부터 있었던 문제다. 우선은 몇 차례 적었지만 나는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회사를 연달아 4주를 연속 쉴 수는 없다.(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초장에 얘기했으면 가능했을 수도) 일단은 2주를 휴가를 내고 왔고, 월초에 가서 하루이틀 정도 지난일을 처리하고 다시 휴가를 낼 생각이었다. 물론 팀장은 이런 내 생각을 모른다.(그래서 방금 전에 이메일을 보냈다.) 팀장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점은, 내 계획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중간에 이곳에서의 일정을 하루이틀 정도 빼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해야 할 날이 올 것이고, 지난주에 다른 일정에 대한 양해를 구하다가 이 허락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점에 미쳐서 나는 머릿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또 하나를 더 들면 병원 문제다. 이제 겨우 약은 끊었지만(?) 아직 병원 진료는 마치지 못했다. 모르겠다. 어쩌면 의사 선생님은 이제 그만 와도 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실은 나았다기보다 진료가 힘들어서 그걸 원하실 것 같다.) 그러나 환자인 내 생각은 다르다. 일단 약을 끊고 나서 수면의 질이 매우 안 좋아졌다. 순천에 내려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곳에 내려오기 전부터 그랬다. 요즘은 수면의 질이 퐁당퐁당이다. 하루 정도는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설치면, 그다음 날은 하루 종일 피곤하고 생활이 엉망이 된다. 그럼 엉망이 된 덕분(?)에 하루는 잘 자고, 그다음 날은 다시 엉망이 되고 이런 악순환이다. 역시 오랫동안 먹던 약을 끊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막상 하고 싶었던 한 달 살이까지 시작했는데 기분은 더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아내와의 추억이 털끝 정도이지만 남아 있는 지역에 와서이려나. 실제로 우울감이 예전보다 많이 늘었다. 섣불리 일상을 깨뜨린 게 후회될 정도로.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병원에도 한 번 가긴 해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 이곳에서의 일정에 하루 정도 더 빠져야 한다. 이건 좀 아쉬웠다. 병원은 문 닫기 전에만 가면 되는 까닭에, 오늘처럼 일정이 일찍 마치는 날이 금요일이었다면 크게 눈치 보지 않고 다녀올 수 있었을텐데. 그런데 하필이면 금요일 일정은 오후 3시에 시작한단다. 3시에 출발하는 차를 타도 병원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회사를 나가고 병원을 가고. 뭐 말하지 않고 혼자 끙끙대고 미룬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서 오늘은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부분에 양해를 구하고 싶다고 하면서. 아니나 다를까. 담당자 분의 반응은 난색 그 자체다. 처음에 이야기하지 않고 이제와서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냐. 처음에 이럴 줄 알았으면 나를 안 뽑고 다른 사람을 뽑았다. 여기에 더해 회사를 다니고 말고는 이곳의 사정이 아니라는 말까지. 특히 한 번 내 사정을 봐 주기 시작하면 다른 참여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각자의 개인 사정을 들고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백 번 맞는 말이다. 내가 담당자였어도 처음에 내가 모든 일정을 다 참여하는 건 불가능하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하루이틀 정도는 빠질 수 있겠다고 하면 뽑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사정을 봐 주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나설 것 같다고 염려했을 듯하다.(그러나 이 부분은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고, 난 경험에서 지난 다른 프로그램의 참가를 통해 대개 참여자들이 자신의 사정으로 프로그램에서 한두 번 혹은 하루이틀은 빠지는 것을 보아 온 터여서 이곳에서도 가능하다고 잘못 판단하였다. 이건 내가 잘못 생각한 거다.) 이것은 백 번을 양보해도 백 번 다 주최 측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잘못한 부분이어서 정말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또 그 와중에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일정에 대한 양해를 얻어 내야 해서 더더욱 또 할 말이 없었다.


여차저차 이야기를 끝내고 오늘은 아는 형님을 만나러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주최 측 때문에 좋지 않았던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담당하시는 분 말이 맞다. 처음부터 이런 사정이었다면 차라리 참가를 하지 않는 게 맞았을텐데. 도랑도 치고 가재도 잡으려는 내 욕심에,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는 내 마음에 주최 측은 조금 곤란해졌고 누군가는 소중한 기회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나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간절한 기회를 잃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그저 나 좋기에 열심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또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관철해 내야 했다. 생각해 보자.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하긴 하지만, 내가 일자리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다른 좋은 일자리를 얻은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또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국 나는 또 주최 측의 입장은 고려하지 못한 채 내 입장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가장 내게 실망스러운 점이었다. 아마 담당하시는 분도 그 점이 가장 답답하셨을 것이다. 뭐 어쩌겠는가. 안 된다고 해도 나로서도 포기하지 않을텐데. 말은 양해를 구한다고 했지만 결론은 답정너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한 마리 미꾸라지가 물 전체를 흐린다고 했다. 사는 동안 내내 내가 물 전체를 흐리는 미꾸라지일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보지 못했고, 늘 다른 어떤 미꾸라지들에 의해 피해를 입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순천 이곳 한곳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더욱 기분이 가라앉는다. 더불어 마음 한켠에서는 분명히 이 점은 내가 잘못한 것인데, 사람이다 보니 주최 측에서도 이런 작은 사정 하나 양해해 주지 못하나 하는 섭섭한 마음도 든다. 그럴 일이 아닌데. 이건 내가 잘못한 일인데. 그치만 지난 세월 겪어 온 일, 보아 온 일들이 있기에 '아니 이것 하나 양해 좀 해 주지'라는 마음도 슬며시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래서 여전히 사람되긴 멀었나 싶기도 하고.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모자람 없는 최고의 일정이라고 생각하고 출발했는데,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정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에게, 순천에게 잘한 건가. 모두에게 잘못한 것은 아닌가. 깊이 침잠하게 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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