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숙이, 경숙 아버지

by 근근

수많은 한줄리뷰를 통해 극을 먼저 접했다. 대부분은 "난해하다"는 평. 극이 난해하다기보단 경숙아베가 난해하다는 말이다. 그가 일반적인 캐릭터가 아니라는 뜻이다. 과연, 보통 캐릭터는 아니었다. 흔히 생각하는 신파적인 한국형 아버지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난해한' 아버지 캐릭터는 아니었다. 이유인즉 우리집 거실에서 20년이 넘도록 마주쳐온 그 얼굴을 너무나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경숙이 아버지는 우리 아빠와 너무 똑같다. 도대체 이 인간이 우리 아빠는 맞는걸까. 의심이 들곤 하는 이기주의자.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경숙이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사람이라지만, 이 인간은 어째 2010년대를 살고 있는데도 가부장적인 사고관을 버리지 못해 시대착오적이다. 나는 그래서 첫 장면부터 극에 매료되었다. 경숙아베의 자기 밖에 모르는 뻔뻔함은 첫장면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전쟁의 이유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저만 살겠다고 도망간다. 가족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가장은 입으로만 책임을 말한다. 가장만 바라보는 처자식은 어떻게든 떼어놓으면서, 가장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쁘다. 간단히 싼 짐 중 가장 큰 짐은 장구다. 경숙 아베는 그런 사람이다. 제 한 몸이 책임의 전부인 남자. 장구 하나만이 삶의 위안인 사람.


그래서 그는 외롭다. 그는 뿌리가 없는 사람이다.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단연 자야와 경숙아베가 풍류를 즐기는 장면과 경숙어메가 경숙이 동생을 낳는 장면이 겹치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경숙아베의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 어느 장면보다 더 어지럽고 흥이 넘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지만 그래서 더 고독했다. 사실 한 생명의 탄생이라는 건 얼마나 성스럽고 아름다운가. 하지만 개벽의 순간은 경숙아베에겐 별 의미가 없다. 경숙아베를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어둘 족쇄가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라날 또 하나의 인간이 생겼을 뿐이다. 경숙이는 그 탄생과 아빠의 고독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한다. 아빠의 풍류 속에 사무치는 외로움과, 딸의 아빠를 따르지 못해서 오는 외로움. 나는 이 두 다른 고독 때문에 이 장면을 최고의 장면으로 꼽겠다.


극은 진행될 수록 경숙아베의 외로움을 부각시킨다. 자야가 경숙아베를 떠났을 때, 경숙어메는 모든 걸 내려놓고 자야를 찾아간다. 경숙아베를 너무나 사랑해서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하는 행동이었을 테다. 극은 이 극단적인 마음을 경숙어메의 할복하는 '자살행위'로 표현했다. 내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고 죄인을 사랑했을 때, 마침내 예수의 은총이 내린다. 자야는 이웃이 된다. 경숙어메와 경숙이, 자야는 가족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숙아베는 또 다시 타인이 된다. 운명처럼 찾아온 고독이다. 떠돌이의 운명인 것이다.


경숙이는 아버지의 신발 선물을 끝내 받지 않는다. 당신의 삶만 생각하는 생각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경숙이는 아버지의 환영에 위로받는다. 그래서 경숙이는 경숙이다. 동생의 탄생 장면에서 아베의 고독에 어쩔 줄 몰라한 그날의 어린 경숙이인 것이다.


경숙이가 결국 아베의 웃음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딸이다. 시대착오적인 인간이라고 욕을 했지만 어쩌겠는가. 당신이 가진 인생의 무게를 언젠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건 내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살아가게 될 나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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