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영웅
블루스퀘어에서 어제부터 시작한 뮤지컬 ‘영웅’ 공연을 오늘 봤다. 어제는 안중근 역으로 민우혁이 나왔는데 오늘은 정성화가 주인공이다. 역시 영웅은 정성화다.
초연부터 안중근으로 열연한 정성화는 첫 곡 ‘단지동맹’부터 무대를 장악하고 압도했다. 역시는 역시다. 영화를 통해서 먼저 ‘영웅’을 접했지만 뮤지컬의 생동감과 역동성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론다. 2009년에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초연을 했는데 무려 십수 년이 흘러 처음 안중근을, 정성화를 만나서 죄송스럽고 미안했다.
설희 역을 맡은 정재은의 황후마마를 부르는 애절한 노래(당신을 기억합니다)는 영화에서 김고은이 부른 것보다 더 애절했고, 피비린내 나는 명성황후 시해 장면은 막 뒤에 실루엣으로 상징적으로 처리했음에도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이게 공연의 맛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눈 내린 만주벌판이 펼쳐진다던지, 회상 장면에서 화면전환이 극적으로 바뀐다던지 영화적인 기법과 뮤지컬의 오리지널리티가 조화를 이뤘지만 무대는 무대만의 매력이 있다. 러시아 시내 추격장면에서의 빠른 템포 음악과 좁은 무대를 입체적으로 살린 추격신은 그 압축의 미학과 긴장감의 조화가 영화 보다 나은 졸깃한 맛을 선사해 줬다. 그런 스릴에 빠져 있다 보니 ‘그날을 기억하며‘ 노래가 흘러나오며 하얼빈 거사가 구체화된다.
언제 1부가 마쳤는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극은 빠르게 전개되고 하얼빈 이토 히로부미 처단과 법정장면으로 넘어간다. 거사를 앞두고 만 서른 젊은 청년 안중근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성당에서의 고뇌 그리고 장부로서 당당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십자가 앞에서), 정성화는 안중근 그 자체였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인가? 당당하게 일본의 죄목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부르는 노래는 속을 다 시원하게 해 준다. 한일 굴종외교를 하고 돌아온 현 정부, 그걸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 야당, 그리고 영웅을 보며 울분을 삼키면서도 행동하지 못한 바로 내가 죄인이다.
삼권분립 국가에서 사법부의 결정을 행정부가 무시하면서 이렇게 일본에 굽신할 필요가 있었을까? 대한민국은 2021년 기준 1인당 GDP 4만 불의 일본과 불과 5천 불 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세계 GDP 순위에서도 독일에 바짝 쫓기고 있는 불안한 3위 국가 일본인데, 일본의 국운이 쇠해가는 걸 보면서도 이런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있었을까?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를 잡기 위한 고금리 정책 속에서도 YCC(Yield Curve Control)를 고수하며 금리도 못 올리고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금리를 조금이라도 올리면 국채로 자금 조달하는 국가 채무 부담으로 휘청거리는 나라 일본, 우린 3.5%까지 기준금리 올려도 쓰러지는 은행 하나 없는데, 또한 코로나 이후 쪼잔하게 반도체 원재료 수출을 까다롭게 했음에도 별 탈없이 극복한 우리나라가 아니었던가? 과연 안중근 선생님은 현재 우리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흑!
오늘은 뮤지컬에 넘 많은 정치와 경제 얘기가 난무했다. 미안하다. 일제 식민지배 직전에 이토를 쓰러뜨리고 한중일이 서로 존중하며 대등한 관계 속 동양평화를 이루고자 했던 안중근의 일대기를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역사의식이 치솟았나 보다. 이해하시라.
마지막 교수형 직전, 어머니가 부르는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에서 눈물이 흐리기 시작하더니, 교수형 장면에서 안중근이 ‘장부가’를 부를 땐 오열로 바뀌었다. 죽음을 앞두고 떨리는 목소리의 안중근은 나중엔 당당히 죽음에 맞선다. 그게 장부다. 그런 장부의 모습을 정성화는 넘치는 성량과 당당한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어찌 오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화 영웅도 좋았지만 내 느낌엔 뮤지컬이 훨 더 나았다. 그 생생한 현장감, 객석을 구석구석 파고드는 성량, 그 넘치는 카리스마 등 뭐 하나 부적한 게 없었다.
뮤지컬은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위안거리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그 깊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깊게 공감하며 진한 위로를 받는다. 음악은 나를 토닥거려 주고 연기는 내 감정을 정화시켜 준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마이클리가 부르던 ‘겟세마네’와 같은 처절함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당당함이 영웅의 ‘장부가’에 다 담겨 있었다. 가슴 벅찼다.
올해 들어서 뮤지컬로는 ‘다이스’, ‘웨이스티드’를 보았고 연극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았는데 그중에서 단연 ‘영웅’이 최고였다.
다시 또 보러 와야겠다.
관람일: 2023.03.18. 오후 2시
캐스트
- 안중근: 정성화
- 이토: 최민철
- 설희: 정재은
공연장: 블루스퀘어
좋아하는 넘버
- 단지동맹
- 당신을 기억합니다
- 그날을 기억하며
- 내 마음 왜 이럴까
- 십자가 앞에서
- 누가 죄인인가
-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 장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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