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남자
10
수업이 밤 9시 50분쯤 끝났다. 교수님께서 좀 일찍 마쳐주셨으면 했는데 수업 종칠 때 까지 끝까지 하신다. 날도 더운데…
아침에 그 남자로부터 문자가 날라왔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오전엔 항상 그 남자로부터 문자가 온다. 초기에는 주로 하루 잘 보내라는 문자가 대부분 이었는데 요즘은 아침에 들으면 좋은 얘기들, 명언들을 문자로 보내준다. 오늘 출근하는데 그 남자로부터 이런 문자가 날라왔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한다—간디 // 겸손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래서 바로 답장을 보냈다.
“겸손이란 덕목은 의식의 영역에 속하죠, 더 늦기 전에 무의식 영역의 나를 찾아 돌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랬더니 다시 문자가 날라온다.
“선문답 나누는 것 같다. 흐흐. 무의식영역의 나를 돌본다. 어렵네요. ^^”
이렇게 문자를 보내며 아침을 상쾌하게 맞았다. 여전히 일은 바빴다. 위에서는 부서원 한명을 충원시켜 주려고 면접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은 같은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내 바로 밑에 직원도 대학원 다닌다고 일 마치면 학교 가기 바쁘고, 나도 대학원 가야 하고. 빨리 충원이 되어야 할 터인데 걱정이다.
점심 무렵이 되어가는데 혁연 선배가 같이 밥 먹자고 한다. 모처럼 선배와 하는 점심이다. 선배에게 한택식물원 선배 소개로 잘 다녀왔다고 했더니, 모르는 척 하며 그랬냐고 되묻는다. 사실 그 남자가 선배에게 얘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밉지가 않다. 그 선배가 그 남자에게 보낸 이메일도 얼마나 정감 있었던가.
그렇게 점심 먹고 배의 포만감을 안고 약간은 노곤한 상태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남자로부터 다시 문자가 왔다.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나른한 오후네요. ^^”
하하. 오전에 내가 말한 무의식, 의식 얘기를 바로 써먹다니. 귀여운걸.
그래서 나도 바로 문자를 보냈다.
“비몽사몽 이란 얘기죠?”
“ㅋㅋ. 헉 들켰다. Chaos! 꿈인 듯 현실인 듯 뭔가 혼동되는 상태죠.”
그 남자랑 문자로 얘기 나누면 재밌다. 나랑 통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아주 섬세하면서도 깊이가 있기도 하고 때론 재치도 있다. 나도 주위에서는 나이 보다 어른스러워 보인다고 하는데 그 남자는 외모만 보면 나 보다 어린 것 같은데 생각은 제법 깊은 것 같다. 그래서 얘기상대로 편하고 좋다.
그 남자의 문자로 기분이 뜬 상태에서 일을 계속했다. 조금 더 있는데 갑자기 학교를 땡땡이 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햇살도 좋고 실록도 우거지는 봄날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 나른한게 수업 땡땡이 치고 놀러가고 싶은데… 신우씨가 진짜로 그러자고 할까봐 겁나는 군요 ^^”
바로 답장이 온다.
“하하하. 가끔 그런 일탈, 그런 상상도 필요하져. ^^”
조금 더 있으니 또 문자가 온다.
“I.C. I’ll let you attend MBA Class, tonight. No Worries”
나도 답장을 보냈다.
“Oh… Feel Sorry ^^;”
11
수업을 마치고 바로 전철역으로 왔다. 사실 버스로 타고 가면 집 바로 앞에서 편하고 좋은데 청계천 공사로 버스가 노선이 변경되어 요즘은 거의 전철을 타고 간다. 혜화역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 남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남자는 오늘 학교 가지 않는 날이다. 술을 먹은 것 같았다. 말투가 조금 다르다. 대학로 부근이라며 만나자고 한다.
그래서 우린 만났다. 나도 저녁 세시간 수업으로 지친터라 시원한 맥주가 그리웠다.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난 호프 한잔을 시키고 그 남자는 병맥주 하나를 시켰다. 갑자기 그 남자가 술먹고 집 부근으로 찾아와서 놀랐다. 그래도 밉지는 않았다. 술 먹으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그 남자가 얘기하고 내가 듣는 분위기 였다.
처음엔 영화 얘기부터 했다. 그 남자는 “Joy Luck Club” 이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고 한다. 난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단지 중국 근대사에서 여인의 삶과 애환을 담은 영화라는 정도. 그런데 그 남자에게는 그 영화가 상당한 영향을 준 것 같다. 그것은 그 남자의 첫번째 영화 평이 “Joy Luck Club” 이었기 때문이란다.
그 영화의 내용만 본다면 그 영화의 제목은 Joy Luck Club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 제목이 기쁨과 행운을 상징한다. 그 남자가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참으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업무가 자기와 맞지 않다고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더군다나 바로 상사가 담보로 잡은 무기명 CD(양도성 예금증서) 20억원을 편취해서 도주하다가 구속되었다고 한다. 도저히 상황상으로는 기쁠 수 없는 상황에서 본 영화가 바로 Joy Luck Club 이란다. 여기 까지 얘기하고 그 남자가 다시 한마디 한다.
“제가 무슨 얘기하려고 이 영화 얘기를 꺼냈죠?”
“아, 영화평 쓰신게…”
“맞다 맞어, 죄송합니다. 술 땜에 잠깐. 흐흐”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 자신의 삶과 비슷한 상황에서 기쁨과 행운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영화속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남자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평을 써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여자 후배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후배가 그것도 영화평이냐고 엄청 나무랬다고 한다. 그래서 한 2년이 넘게 영화평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은 처음에 잘 못하더라도 잘 한다고 격려해주고 북돋아 줘야 더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함께 그 남자는 영화 얘기를 끝냈다. 지난번 이 남자와 송강호의 “살인의 추억”을 같이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남자가 자칭 “김신우의 영화 까발리기”라고 써서 영화평을 보내 준 적이 있었다. 재밌게 읽었었는데.
또 그 남자는 엄마와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께 자신이 쓴 시집 “젊음은 나래를 펼쳤는데…”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언제 기회 되면 나에게도 그 시집을 준단다. 아들이 부모님에게 본인이 쓴 시집을 보내주고 그 시 내용을 같이 나누고 하는 모습이 부럽다. 나도 좀더 정겹게 엄마에게 연락도 하고 얘기도 나누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 남자가 더 딸같이 부모님을 대하는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직장을 다니신다. 고등학교 시절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엄마는 일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일을 하셔서 두 딸을 다 대학까지 마치게 하셨다. 지금은 동생이 엄마와 같이 고향에서 산다. 내 동생은 어린이 집 교사이다. 애들을 돌보고 피곤한 상태에서도 저녁땐 항상 교회로 간다. 그리고, 밤 늦게까지 교회에서 활동하고 집에 온다. 엄마와 많은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몸도 허약한 애가 어떻게 그렇게 교회일에 매달리는지 사실 이해가 잘 안된다. 그런데 동생 얘기로는 교회 가기 때문에 이렇게 맘도 편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난 엄마에게 좀더 잘 해드리라고, 좀더 얘기도 많이 하라고 한마디씩 한다. 그렇지만 사실 난 전화도 자주 못하고 찾아뵙지도 못하는데 동생은 엄마 곁에서 계속 있었다. 내가 동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아니다. 그저 가끔 엄마한테 전화해서 얘기 나누고 용돈 드리고 하는 정도로 첫째의 역할을 다 할 뿐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부모님과 대화가 많은 것 같다. 자기가 쓴 시도 보내고 그걸로 대화꺼리도 찾고. 부럽다.
이런 얘기를 하는 동안 시계는 12시 부근을 가리킨다. 우린 그 호프집을 나와서 집쪽으로 걸어갔다. 그 남자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뭔가 행동하려는 듯 망설인다.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집 앞에 도착할 때 까지 달라진 것이 없다. 집 앞에 도착해서 잘 가라고 얘기하는데 그 남자가 손을 내민다. 고작 악수라니. 그렇게 우린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12
“신우씨! 내일 못만날 것 같아요.”
자다가 일어난 목소리로 그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원래 일요일 오후에 이태리 식당에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토요일에 친구들이랑 라켓볼 치고 맥주 한잔 하고, 일요일에는 김포 공항쪽에서 결혼식 있어 오후엔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그래서 토요일 밤 12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남자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그 남자는 식사는 안하더라도 얼굴만 보면 안되겠냐고 하는데 내가 그냥 짤라 버렸다.
사실 이남자랑 나는 잘 통한다. 서로 공통점이 참 많다. 운동도 좋아하고 영화, 뮤지컬도 좋아하고 또 같은 금융계에 있어 업무적인 얘기도 잘 통한다. 그런데, 잘 통한다고 사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뭔가 이성적인 흥분과 설레임이 있어야 하는데 이 남자에게서는 그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고민이다. 나도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마냥 20대처럼 불 같은 사랑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포기하려고 하면 포기가 잘 안된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그 남자는 훌륭한 사람이나 남성으로 보면 약하다. 머리가 어지럽다. 그래서 밤 늦었지만 그 남자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맥주 캔 하나를 먹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계속 만날 수는 없는데 이 남자를 놓치긴 아까운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도 이 남자는 항상 이벤트를 만들어 나를 즐겁게 해준다. 주말에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그 남자와 있는 것이 당연히 재밌다. 그렇게 만나다 보니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지난 주에 만나서 이태리가서 노천 까페에서 파스타 먹고 싶다고 얘기 했더니 바로 이번주에 그런 이태리 분위기 나는 식당을 발견했다면서 같이 식사하자고 전화가 왔다. 순간 나의 말에 귀기울여 주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긴장이 되는 것이다. 왜일까. 그 남자가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다고 느껴서 일터인가?
오늘 오후에는 그 남자로부터 이런 문자가 날라왔다.
“수미씨가 무자게 보구싶……………………………………………………………………어하는 책 다 읽었어요?”
웃음이 나왔다. 그 책은 내가 한택식물원에서 읽은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이다.
“1권은 다 읽었는데 2권을 아직 못 구했어요”
“어떤 내용이길래 그렇게 2권 구하려고 애쓰는지 궁금하네요?”
“분노하는 여자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자 얘기 ^^”
“분노하는 여자라, 조금 무섭네요”
“신우씨가 어떤 느낌으로 읽을지 사뭇 궁금하네요”
이렇게 문자를 오가면서 만남 없이 일요일 오후를 보냈다. 저녁 무렵엔 전화를 끄고 일찍 잤다.
13
아침에 수영복을 챙겨 수영장에 갔다. 아줌마들 틈새에서 수영을 배운 것도 네달이 다 되어간다. 이번 주부터는 버터플라이(접영)를 배운다. 그래서 기대가 많이 된다. 처음엔 물을 무서워해서 과연 수영을 배울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접영까지 들어가다니.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하다. 수영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데 어제 약속을 깬 것이 조금 맘에 걸린다. 이번 주 중에 한번 만나서 내 솔직한 심정을 얘기 할까. 아니면 이런 상태로 좀 더 만나 볼까. 결정을 못 내리겠다. 그래도 그 남자가 편하기 때문에 계속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잔인한 생각인가? 그 남자는 나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은데. 모르겠다. 접영을 배워 맑아진 머리가 다시 복잡해 진다.
회사에 가서 의례 메일 확인을 해 보았다. 그 남자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온다. 밤에 전화 몇 번 했다는 말과 함께 피로가 많이 풀렸냐고 묻는다. 그 밑에 그 남자가 쓴 시가 한편 있다. “휴대폰” 이란 시다.
휴대폰
감정(感情)의 기복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삶에서
난 그것이 감정(感情)에 솔직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살았는데
그러면서 나의 가장 큰 단점이라는 걸
부인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자꾸만 죄어오는 世上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지.
감성(感性)은 풍부하게 드러내되
감정(感情)은 숨겨야 된다는
아주 작은 진리를
오늘 하루
전원이 꺼져 있는
그녀의 휴대폰을 탓하며
몸서리치게
깨닫게 될 줄이야…
읽고 나니 가슴이 미어질 듯 벅찬 기쁨이 밀려오기도 하고 그것이 부담으로 무겁게 누르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되지. 걱정이다. 그리고, 또 그 남자로부터 오늘의 얘기니 뭐니 해서 문자가 날라온다. 이번 주에는 만나서 솔직한 느낌을 나누고 얘기하고 싶은데 막상 먼저 만나자고 말을 못하겠다. 이를 어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