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를 고쳐쓰자

인생의 내비게이터

by 메추리

이력서를 고쳐쓰자


오늘 오후 멀쩡하게 직장 잘 다니고 있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잠깐 시간 좀 내달란다. 느낌이 왔다. 다행이 그 후배 회사 근처에서 미팅이 잡혀 있어 미팅 마치면 연락 하리라고 했다. 미팅을 마치고 연락하니 근처 별다방(Starbucks)에서 만나자고 한다.


안으로 들어갔다. 뭐 먹을지 후배에게 물었다.


후배: 전 계절메뉴요.

나: 뭥?

후배: 저기 보이는 계절 메뉴요.

나: 그게 뭐지?

후배: 산타 햇 다크 모카요.

나: ㅠ.ㅠ


벌써 의문의 1패다. 이럴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뭔가 나만 나이든 것 같은 생각에 얼얼하다. 나도 주문을 해야 한다.


나: 얼그레이 주세요.


자리에 앉았다. 후배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 직장 다니면서 다음 일자리 알아봤어야지. 안그래도 추운데. 더 춥다구.

후배: 아예 관둬야지 편하게 일자리 알아볼 수 있을것 같아서요.

나: 겨울이야. 춥다구. 지금 일자리도 별로 없고 경력 뽑는 시즌도 아니고. 날이라도 따뜻해야 덜 움추리는데.

후배: 글게 말이에요.

나: 그리고 이직을 하려면 미리 미리 준비를 해야 된다고. 날 최소한 6개월 전에 만났다면 좀 더 도움되는 얘기 많이 해줬을 텐데. 아쉽긴 하네.

후배: 지금이라도 해주세요.



그러니까 내가 직장 3년차 쯤 되었을 때다. KTB네트워크 근무시절 벤처투자본부 인터넷2팀 팀장으로 삼성물산 출신 변준석팀장님이 오셨다. 하루는 경력관리 얘기가 나왔다. 변팀장님은 최고의 경력관리는 이력서를 정기적으로 고쳐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력서를 분기나 반년 주기로 계속 업데이트를 하다 보면 내가 3개월 혹은 반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발전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부족한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될지 방향이 나온다면서.


난 그 말을 들은 즉시 이력서를 만들어 보았다. 신입으로 KTB에 들어온지라 요즘 느낌의 이력서는 없었다. 더군다나 옮길 생각도 없었기에 이력서를 만들 이유가 없었지. 그래도 변팀장님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한번 실천해 보기로 한 것이다.


첫 이력서를 쓰고 두세달 뒤어 다시 꺼내보니 그 동안에 뭐 한게 없어 이력서 한줄 추가하기가 어렵더군. 학력도 보니 학부 졸업 한줄 덜렁. 투자 성공된 것도 없고. 더군다나 전문자격증은 전무. 어이쿠! 이러면 안될 것 같았다.


학력란에 하나 더 추가해야 될거 같았다. 대학원 다닌 선배를 수소문했다.


나: 형님, 저 대학원 가려는데요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선배: 학교는 너가 잘 선택하고 근데 전공은 뭐할거니?

나: 마케팅이 재밌어서 그거 하려구요.

선배: 너 미쳤니? 너 학부 전공 경제학 아니야?

나: 맞아요.

선배: 그리고 너 계속 투자일 할거니?

나: 당연하죠. 왜요?

선배: 그럼 이공대 출신 애들이 치고 들어오지 못하는 너 만의 영역을 계속 파고들어야지. 왠 마케팅이니!

나: 그럼 뭐 하는게 좋죠?

선배: Finance해라. 그게 경제과 출신에겐 제일 어울려. VC에서 수명도 길고 도움도 되고.


그렇게 선배의 조언대로 난 2002년 한양대 경영대학원 재무관리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2002년 7월엔 KTB도 관뒀다. 그리고, 난 온라인 광고 미디어랩사인 리얼미디어코리아의 CFO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9월부터 출근하기로 하고 화끈하게 유럽 배낭여행 떠났다. 역시 놀땐 화끈하게. ㅇㅎㅎ


2003년 리얼미디어코리아 코스닥 예비심사 청구도 해봤다. 물론 탈락되었지만. 탈락후 바로 M&A에 돌입해서 미국 WPP에 매각에 성공했다. 이력서 또 한줄 추가다. ㅎㅎ


2003년 12월 HB인베스트먼트로 옮겼다. 그리고 다음해 난 코스닥 상장사 보이스웨어 인수 실무팀장을 맡았다. 인수후 4년동안 보이스웨어 PMI(인수후 통합), 물적분할 후 매각, 비상장사 인수(DSP, 미디어래보러토리), 엔터테인먼트사 인수, 합병 등등을 경험했다. 이력서 마구 마구 추가다. ㅎㅎ


2004년 8월 드디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젠 학력란도 하나 추가다. 2007년 10월 IDG Ventures Korea 한국법인 설립멤버로 합류했다. 국내 VC인 KTB와 HB 두곳에서 투자경험을 해 보았고 이젠 외국계 VC다. 거기다 이사 직급이다. 오 마이 갓. 임원이라니.


2011년 난 IDG에서 대표가 되었다. 2011년 말에는 스타트업 토크쇼 '쫄지말고투자하라(쫄투)'를 시작했고, 2012년말엔 경영학박사 학위도 통과되고. 스타트업을 위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스타트업 창업교육 프로그램 '쫄지마창업스쿨'도 그 무렵 시작했다. 이력서가 이젠 풍성해졌다.


나의 이력서 고쳐쓰기는 아마 2012년 까지였던 것 같다. 최소한 반년에 한번 이상 난 이력서 파일을 오픈해서 지속 업데이트 해갔다. 한줄 한줄 학력란, 경력란이 늘어 날때마다, 예전의 어설픈 이력을 걷어내고 제법 멋진(?) 내용으로 수정할 때마다 난 쾌감을 느꼈다.


예전 그 선배의 조언이 나를 스스로 담금질하게 만든 것이다. 이력서를 고쳐 쓰며 과거를 반성하고 커리어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노력하며 살았다. 이런 얘기를 오늘 후배에게 해준거다. 내가 선배로부터 받은 그대로.


내가 이력서를 고쳐쓰기 시작한 때가 서른 쯤으로 기억난다. 후배도 비슷한 나이다. 아직 젊다. 이제부터 고쳐 나가도 충분히 멋진 인생을 그려갈 수 있을 거다.


그럼 내가 왜 이력서 고쳐쓰기를 2013년부턴 안해왔는가? 그건 몇가지 이유가 있다.


1. 이력서 낼 곳이 없다. 내가 VC를 만들 거니깐

2. 십년 넘게 이력서를 고쳐쓰다 보니 그게 이미 체화되었다.

3. 대표는 더 이상 이력서를 안써도 된다.

4. 마흔 넘어서는 살아온 삶 자체가 이력서다.


그래도 난 매일 매일 머리속으로 내 이력서를 써간다. 2013년 이후에도 난 창업 펌프질 책 '쫄지말고창업', 대학교재인 '기업가정신의 이해'도 출간했다. 2015년엔 산티아고 순례길도 다녀왔고 2016년 1월엔 VC 코그니티브인베스트먼트도 설립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만의 이력서를 써 갈거다.



2016.11.15. 오후 10:32분 변기 위에서 아이폰7으로 쓰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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