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금이 흐르는 바닷길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역사

by 복국

미국과 이란 간 종전협상이 결렬된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를 들고 왔다.

이미 막혀있는 호르무즈 해협을 더 막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즉 이란의 통행료 수입을 차단하고 이란의 원유 수출길도 막아서 이란의 경제를 더욱 파탄으로 유도하고 유리한 위치에서 이란과의 협상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호르무즈는 이렇게 인기가 좋았을까? 허구헌날 강대국들이 이렇게 내키는 대로 막아제꼈던 것일까? 호르무즈 해협은 오랜 옛날부터 누군가의 탐욕과 누군가의 절박함이 충동하는 바다였다.


1. 향신료와 비단의 관문: 호르무즈 왕국의 독점 (13세기~15세기)

호르무즈가 역사 무대의 중심에 등장한 것은 석유가 발견되기 훨씬 이전, 이른바 '향신료의 시대'였다. 인도양에서 생산된 막대한 후추와 계피, 그리고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는 뱃길을 따라 페르시아만으로 들어와 중동의 육로를 거쳐 유럽으로 넘어갔다.

원래 페르시아만 연안 육지에 있던 호르무즈 왕국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입을 피해 육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척박한 섬(현재의 호르무즈 섬)으로 수도를 옮겼다. 식수조차 부족한 소금투성이 섬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지정학적 위치만큼은 완벽했다. 섬에 자리 잡은 호르무즈 왕국은 페르시아만을 드나드는 모든 상선에 막대한 통행세를 물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봉쇄'는 무력을 바탕으로 현재보다 더 노골적인 무역 독점이자 통제였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호르무즈의 동서 교역의 교차점으로서의 번영과 동시에 섬의 극심한 더위와 혹독한 자연환경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기록을 남겼다. 호르무즈 왕국은 해협을 순찰하며 세금을 내지 않는 배들을 나포했다.

중세의 호르무즈 해협은, 그들의 허락을 받은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거대한 해상 톨게이트였다.


2. 대항해시대의 포성: 포르투갈의 군사적 봉쇄 (1507년~1515년)

호르무즈 해협이 서구 열강에 의해 최초로 무력 봉쇄된 것은 16세기 초반의 일이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에 진출한 포르투갈 제국은 아시아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인도양의 3대 거점인 아덴, 호르무즈, 말라카를 장악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507년,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제독 아폰수 데 알부케르크가 이끄는 함대가 호르무즈섬 앞바다에 나타났다. 화승총과 압도적인 함포를 앞세운 포르투갈 군대는 호르무즈 왕국의 수비대를 제압하며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1차 원정은 내부 반란으로 알부케르크가 철수하면서 완전한 점령에는 실패했다. 완전한 통제권은 그가 재차 원정을 감행한 1515년, 섬에 견고한 '성모 잉태 요새'를 완공하고 나서야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때부터 약 107년 동안 포르투갈은 호르무즈 해협을 철저히 군사적으로 통제했다. 오스만 제국이나 아랍 상인들의 배는 포르투갈의 통행증(카르타즈)을 사지 않으면 함포 사격을 받고 침몰해야 했다. 해협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경쟁 세력의 경제적 숨통을 죄어매는, 딱히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해협 봉쇄 작전이었다.



3. 제국의 몰락과 새로운 패권: 영-페르시아 연합군의 호르무즈 탈환 (1622년)

영원할 것 같았던 포르투갈의 통제는 17세기에 접어들며 도전을 받게 된다. 사파비 제국(페르시아, 현재의 이란)의 군주 아바스 1세는 자국 앞바다를 막고 있는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에는 변변한 해군이 없었다. 이때 아바스 1세에게 손을 내민 것이 신흥 해양 강국으로 떠오르던 영국 동인도 회사였다.

1622년, 페르시아의 막강한 육군과 영국 동인도 회사의 무장 상선들이 연합하여 호르무즈 요새를 포위했다. 영국 함대는 바다에서 포르투갈 배들을 봉쇄해 보급을 끊었고, 페르시아 군대는 섬에 상륙해 공성전을 벌였다. 결국 굶주림과 식수 부족에 시달리던 포르투갈 수비대는 항복했다.

이 사건은 호르무즈 해협의 패권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영국과 페르시아로 넘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아바스 1세는 해협의 무역 중심지를 섬에서 본토의 항구 도시인 반다르 아바스로 옮겼고, 호르무즈섬은 역사 속으로 서서히 잊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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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석유 시대의 개막과 유조선 전쟁 (1984년~1988년)

20세기에 들어서며 호르무즈 해협의 가치는 향신료에서 석유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중동에서 엄청난 양의 석유가 터져 나오면서, 이 해협은 전 세계 산업의 피가 흐르는 동맥이 되었다. 그리고 이 동맥을 끊어버리려는,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실제적인 봉쇄 시도가 벌어졌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기간 중의 '유조선 전쟁'이다. 현재와 가장 비슷한 형태의 봉쇄로 발전했다고 해야 할까?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기 위해 이란의 주요 석유 수출항인 카르그섬과 그곳을 오가는 유조선들을 프랑스제 엑조세 대함 미사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1984년) 분노한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의 지리적 이점을 무기로 삼았다. 이라크는 물론, 이라크를 지원하는 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연안국들의 원유를 싣고 나가는 민간 유조선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란은 쾌속정을 동원해 유조선에 기관총과 로켓포를 쏘고, 해협 곳곳에 기뢰를 살포했다.

수백 척의 상선과 유조선이 공격받았고, 해상 보험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선원들은 방탄조끼를 입고 조타실에 모래주머니를 쌓은 채 목숨을 걸고 해협을 통과했다. 해협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었으나, 공포와 위험으로 인한 사실상의 경제적·심리적 봉쇄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결국 세계 경제의 붕괴를 우려한 미국이 쿠웨이트 유조선에 성조기를 달고 해군 군함이 호위하는 '어니스트 윌 작전'을 펼치며 직접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함정이 이란의 기뢰에 피해를 입자, 미 해군은 이란 해군 전력 상당 부분을 궤멸시키는 '사마귀 작전'으로 응수했다.


냉전이 끝나고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호르무즈 해협의 수난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을 둘러싼 서방의 제재가 심화될 때마다, 이란은 호르무즈 봉쇄를 외교적 무기로 꺼내 들었다.

2011~2012년 위기 당시, 미국과 EU가 이란 중앙은행을 제재하고 이란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자 이란은 해협 봉쇄를 공언하며 대규모 해상 훈련을 벌였다. 미국은 항공모함 전단을 추가 파견하며 일촉즉발의 긴장이 조성되었다. 2019년에는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노르웨이, 일본 등의 유조선들이 기뢰 또는 어뢰로 추정되는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이란 혁명수비대를 배후로 지목했다. 전면전으로 번지지는 않았으나, 해협의 불안정성이 극에 달했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최대의 해협 봉쇄는 우리 시간 기준으로 오늘 오후 11시부터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순간인건가?


현대의 호르무즈 봉쇄는 과거처럼 거대한 사슬을 바다에 치거나 성벽을 쌓는 방식이 아니다. 수백 개의 기뢰를 몰래 뿌리고, 지대함 미사일을 해안에 배치하고, 벌떼처럼 달려드는 소형 고속정과 자폭 드론을 활용하는 비대칭 전력이 핵심이다. 단 며칠만 통행이 지연되어도 전 세계 유가는 요동치고, 글로벌 공급망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다. 호르무즈 해협에 한해서는 이 명제가 참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제국들은 향신료와 통행세를 위해 대포를 쏘며 해협을 막아섰고, 현대의 국가들은 지정학적 생존과 석유를 담보로 미사일과 기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교역품이 비단에서 원유로 바뀌었을 뿐, 그 좁고 푸른 바닷길은 언제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교차로였다. 아마도 앞으로도 배우가 달라질 뿐이지. 고리타분하고 모두에게 힘겨운 이 드라마는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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