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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국 Feb 07. 2023

경쟁에 열광하는 사회

   '피지컬 100'을 시청한 후

우리 사회는 과도한 경쟁을 경계한다.

경계를 넘어서 배척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학교에서 근무하며 느낀 바로는

교육정책은 다양성을 강조한다.

자유학기제, 고교학점제, 스포츠 클럽 등 여러 교육정책을 아우르는  교육과정의 목표에는 다양성과 개성을 명문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최대한 경쟁을 회피하고자 하는 교육 정책 입안자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성적 위주의 과도한 경쟁은 학생들에게

큰 부담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 목적지가 제한되어 있어 어차피 경쟁하게 되는 시스템이라는 교육 정책의 한계는 일단 제쳐두자.)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피지컬 100'을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는 경쟁을 싫어하는 걸까?

그런 것치고는 경쟁에 꽤나 열광하고 있지 아니한가??

'피지컬 100'이라는 프로그램은

제목 그대로 신체적 매력이 극대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단련된 육체를 활용하여 경쟁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외연이 충돌하고 부딪치는 모습도 흡족한데, 참가자들의 욕망과 부끄러움, 뿌듯함 따위의 지극히 개인적 내면이 이따금씩 분출되는 상황을 감상하는 재미도 그 못지않다. 연출과 기획 모두 자극적이고 노골적인데, 그걸 기대하고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제대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프로의 재미를 보장하는 것은 그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억이라는 상금을 걸고 그 열매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은 그 순간 대한민국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경쟁한다.

앞서 그들의 내면까지 관찰 가능하다고 했는데,

난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육체가 그들에게는 하나의 자부심 혹은 아이덴티티랄까, 육체 그 자체보다 더 굉장한 것을 갈아 넣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은 미션에 실패할 때 자존감이 상했다. 자신감을 상실했다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개인적으로 자부심, 자신감, 자존감 등의 단어의 의미를 구분하는 것이 심리학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일상에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좌절하고 상처 입는데 그 모습에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보인다.

각종 경쟁에서 소외되고 실패하며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피지컬: 100'이라는 프로그램에 열광한다.

생각해 보면 이런 서바이벌을 강조한 경쟁 시스템의 버라이어티 쇼가 사람들로부터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 세대들이 그나마 기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요 톱 텐'같은 이야길 하면 고대 제천행사의 느낌이려나?!, '슈퍼스타K'나 '나는 가수다'는 어떨라나?

 '프로듀서 101' , '쇼 미더 머니' 시리즈나 '미스터 트롯'이나 '스트릿 우먼 파이터'같은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이들 프로그램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드롬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인기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들 프로그램의 기획 포맷의 확고한 지분을 서바이벌이 차지하고 있다.

즉 우리 사회가 그렇게 혐오한다고 주장하는 '경쟁과 선발'에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광한다는 것이다.

슈퍼스타 K 도 '영고', '동맹'같은 느낌이려나, 시즌 1의 우승자 앳된 서인국

단순히 내가 경쟁에 참여하여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싫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쟁은 즐기는 심리에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만일까?

사실 각종 스포츠 리그도 사실은 경쟁 속에서 재미를 창출한다.  그러니 인간은 꽤나 경쟁에 익숙하고 경쟁을 즐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가설을 세워 보았다.

경쟁은 우리의 본능이 아닐까?

유전자 입장에서도 경쟁은 생존에 굉장히 유리한 메커니즘이다. 경쟁하지 않는 무리는 격변하는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기 마련이다.

사계절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 국민들은 굉장히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고 한다. 그래서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치열하게 문제 해결에 뛰어든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영상 40도 영하 30도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에 반해 북미나 유럽에서는 급변하는 날씨에 따라 사망자가 속출한다.

그러니까 어떠한 종이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는데

경쟁으로 인한 생존에서도 이러한 스트레스가 동반되고 이 스트레스는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경쟁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에 비해 경쟁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더 압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생존을 목적으로 한다면 인류라는 종에 있어서

경쟁은 꼭 필요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네안데르탈인도 호모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뒤처진 거 아니겠는가?!

가끔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사람들은 칭찬에 목말라한다. 어린아이만 그런 것 같지만 사실 나이가 들수록 인정욕은 심해진다.

(칭찬해 주는 사람은 적어지고 칭찬의 획득 난이도는 높아지니까) 삶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된 후에는

인정욕이 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왜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딘가에 탁월하다는 것이고 탁월하다는 것은 다른 이들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즉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것이 인간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찬양하고 스스로도 자신이 그러한 개체가 될 수 있도록 북돋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경쟁을 흠모하는 우리는 왜 사회적으로는 경쟁을 억제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 사회에서의 경쟁이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려고 하는 경쟁인데 나의 패배 확률이 높아진다면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형벌일 뿐이다.  

만약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공정한 경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과거 존재했던 위정자들의 위치는 그들이 경쟁에서 획득한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명백하게 알고 있다.

경쟁은 본능이지만 각 개체가 공정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사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적인 유토피아 세계만큼이나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부모의 지위, 가정 형편, 국가의 위치, 지역의 기후 하찮은 것이라도 우리의 공평한 경쟁을 방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공정한 상황 속에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치를 인간들은 계속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이다.

애초에 이러한 부조리를 깨달은 것이 니체나 마르크스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제약하는 다른 조건들을 저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신을 가장한 지배자들의 논리였던 자본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던 권력자였든 간에 말이다.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다. 물론 좋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행동이고 제한된 공급과 많은 수요가 존재하는 한 경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좀 더 정확한 목표 의식을 가져야 한다.

경쟁을 없애고 모두가 편안한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인류의 발전에도 결코 유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열중해야 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이다.

특히 학교 교육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아직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 학생들은 공정한 시스템 속에서 경쟁해야 한다.

경쟁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공정한 조건 하에서 경쟁하는 것에 대하여 민감해질 수 있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단적으로 현재 추진 중인 고교학점제와 같은 교육 정책을 살펴보면, 다양성을 존중하고 학습 선택권을 강화한다는 명목 하에 현실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학교 교육 환경을 무시하고 학생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고 다양한 소인수 과목의 저변을 넓히는 교육 방식이 과연 공정한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한된 특권을 부여하는 것인지에 대한 신중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초점을 공정한 경쟁에 맞추어야지 마치 경쟁이 없고 다양성만이 홀로 남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명분으로 내세워 막상 입맛대로 바뀌는 교육 정책에 휘둘려야만 하는 교육 종사자 및 소비자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런 예는 수없이 존재한다. 어른인 우리는 올바른 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하는데 그 방향성은 구체적이고 명확할수록 좋다. 막연하고 듣기 좋은 이상보다는 현실적이고 명확한 보호장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쟁과 선발에 대하여 더욱 고민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라인이 여러 개라고 경쟁이 없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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