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드스타 강우혁

by 은예진

“안녕하세요?”


서아가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서점 안으로 들어섰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어? 사장님이 자리를 비우셨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서고 안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브라운색 데님 앞치마를 매고 책을 정리하던 청년이 고개를 내밀며 인사한다.


“사장님은 안 계신 모양이네요?”

“아버지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제가 보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러고 보니 사장님 많이 닮으셨네.”


서아가 싱긋 웃으며 바라보자 청년이 어색한 듯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제가 무슨 책 찾으러 왔는지 모르시겠다. 제가 알아서 찾아올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서아는 손을 흔들며 맨 안쪽에 있는 방송 관련 서적을 진열해 놓는 서가로 걸어갔다. 요즘은 대형 서점에서 중

고서적을 취급하면서 헌책방이 헌책방 같지 않게 세련된 곳이 많다.


이곳 누리 서점은 세련된 요즘 중고서점과 다르게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나는 허름한 헌책방이다. 그렇지만 누리 서점 사장님은 귀한 절판 서적이나 유명 저자들의 1쇄같이 특화된 책을 구해주는 것으로 헌책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서아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십 년째 이곳 서점을 들락거리며 아빠가 쓴 책을 모으고 있다. 사장님은 단골인 서아를 위해 나름 신경을 많이 써 주신다.


방송 총서 사이에 끼어 있는 ‘시청자를 울고 웃기는 드라마’가 눈에 뜨였다. 사장님이 이번 책은 정말 어렵게 구했다고 말씀하셨다. 아빠가 쓴 책 중에 다른 책들은 모두 시중에 많이 나와 있는데 이 책은 잘 나오지 않아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 아빠가 조연출을 하던 시기에 썼고 스스로 절판을 시키는 바람에 더 구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서아가 기분 좋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는 사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기다란 팔이 튀어나와 책을 낚아챘다.


“어? 어, 어?”


당황한 서아의 입에서 어? 어? 소리만 연신 흘러나왔다. 서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뒤에 바싹 붙은 커다란 남자가 책을 뽑아 들고 몸을 돌린 뒤였다.


“이보세요!”


서아의 입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서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시하며 서가를 빠져나갔다.


“이보세요! 아저씨!”


못 들은 척 걸어 나가던 남자가 흠칫 놀란 듯 발걸음을 멈췄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장신의 키에 넓은 어깨, 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평범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실루엣인데 그렇다고 누구다 싶게 딱 잡히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남자는 말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왜냐는 듯 책을 들었다.


“그 책, 내 책이란 말이에요. 왜 아저씨가 그 책을 집어가요? 내가 여기 사장님 전화받고 찾으러 온 내 책이에요. 그 책 사려고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아요?”


남자가 드디어 ‘나, 참!’이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여기 누가 아저씨야? 아저씨가 어디 있어?”


어? 이 목소리는? 그러고 보니 저 스타일은? 서 설마? 배우 강우혁?


놀란 서아가 입을 살짝 벌리고 멍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는 듯 다가와 서아 앞에 바싹 붙어 섰다.


“내가 아저씨라면 너는 꼬마니? 꼬마야, 나도 저 책을 일찌감치 주문해 놨고, 찾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여기 사장님 전화받고 온 건데 그럼 사장님이 두 사람한테 책을 팔았단 말이에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나는 정정당당하게 내 책을 가져간 거니까 도둑 취급하지 말라고.”


그때 좀 전의 그 청년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저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네?”

“착오?”


서아와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메모해 놓으신 거 보고 제가 강우혁 씨한테 전화드린 건데 지금 아버지한테 여쭤보니 여자분이 먼저 주문하신 거라고……”


“거 봐요. 내 거라잖아요.”


서아가 까치발을 떼고 강우혁이 들고 있는 책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에 질세라 강우혁은 더 높이 책을 치켜들었고 서아는 허공을 향해 팔만 허우적거렸다.


“나도 저 사람한테 전화받고 가져간 건데 먼저 가져간 사람이 임자지 무슨 그런 말씀을.”


강우혁은 책을 등 뒤로 감추고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화가 난 서아가 발을 구르며 청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해결해 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먼저 사장님 전화를 받았는데 아드님이 실수를 하셨으면 정정을 해 주셔야지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먼저 가져가신 분이 우선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래도 청년은 연예인 강우혁에게 더 잘 보이고 싶은 것 같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전화한 것도 어찌 보면 강우혁을 만나고 싶었던 욕심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서아가 울상을 지었지만 강우혁은 입꼬리를 올리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싸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듯 느긋한 걸음으로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쳤다. 서아 보란 듯이 오만 원짜리 두장을 주고 거스름 돈은 커피 사 먹으라며 청년에게 인심을 썼다.


청년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강우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서아가 노려보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화가 나서 씩씩거리던 서아는 강우혁이 서점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따라나섰다.


오래되고 낡은 이 층 건물에 자리 잡은 누리 서점의 계단은 좁고 경사가 가팔랐다. 서아는 그 계단을 내려가는 강우혁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뛰어내리다시피 달린 서아는 속도를 늦추지 못해 그대로 강우혁의 품에 던져지듯 안겼다.


강우혁은 놀라서 ‘어어’하다 자기도 모르게 팔을 벌려 서아를 안고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강우혁과 서아가 같이 계단 아래로 구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서아의 몸이 강우혁의 가슴에 부딪치는 순간, 셔츠 속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상체 근육에 화들짝 놀랐다. 지난번 드라마에서 강우혁은 회당 한 번씩 윗옷을 벗었다. 걸핏하면 샤워를 하고 체육관에서 윗옷을 벗어던졌다.

그럴 때마다 여성 시청자들 입에서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여성 커뮤니티나 드라마 게시판은 온통 강우혁의 벗은 몸을 칭찬하는 글로 넘쳐났다. 그가 근육을 옷으로 감추는 것은 죄악이라는 말까지 하는 시청자가 있었다. 엉겁결에 강우혁의 품에 안겨 그의 몸을 느낀 서아는 TV에서 보던 근육을 현실로 경험하는 체험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찔한 상황에서도 책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발끝에 힘을 주고 버텨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