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 미술관

by 은예진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에는 아직 시립 미술관이 없다. 대신 경안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지의 경치 좋은 곳에 미술관이 하나 있기는 하다. 지금은 인구 사십만을 바라보고 있는 광주시지만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아직 광주군이었다.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발령받은 곳이 경기도 광주시였다. 당시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저녁 아홉 시면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종량제봉투를 사려고 나갔다 문을 연 마트가 없어 포기하고 들어와야만 했다. 내가 이사 오고 나서 시로 승격했지만 시내에는 보라색 보자기에 쟁반을 싸서 들고 다니는 다방 아가씨들이 낯선 풍경을 만드는 곳이었다. 우리 사위는 충청남도 논산에서 살았는데 촌놈 부심이 있어서 시골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일단 이마트가 있으면 그곳이 시골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지금은 이마트도 있고 멀티 플렉스도 있지만 당시에는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곳도 없고 대형 마트도 없었다. 2000년 그런 곳에 미술관이 생긴다는 소리를 듣고 다들 얼굴에 물음표를 열개쯤 달며 물었다.


"진짜, 저게 미술관이라고? 왜? 부동산 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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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문화 불모지에 우뚝 선 것이 '영은 미술관'이었다. 영은 미술관은 대유문화재단에서 2000년 11월 4일에 개관했으니 벌써 25년이 되었다. 그 사이 광주시는 시청을 새로 지으면서 아트홀을 만들어 꾸준히 공연을 하고 있지만 여태 시립 미술관은 세우지 못했다. 그나마 영은 미술관이 있어서 시민들에게 미술품 관람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대유문화재단 설립자인 이준영의 '영'과 아버지보다 먼저 유명을 달리한 장남 이상은의 '은'을 따서 만든 미술관은 전시 이외에도 창작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국내외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곳 레지던시에서 작가들은 아티스트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상호 소통과 협력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처음 미술관이 들어올 당시 준재벌의 부동산 투자라고 봤던 나도 레지던시를 통해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늦가을 바람에 낙엽이 휘몰아치는 일요일, 오랜만에 영은 미술관으로 향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기 때문에 가보지 않고 미뤄두었던 곳이다. 예전에는 가끔 산책 삼아 드넓은 잔디밭을 걷기도 했지만 요즘은 뜸했다. 지나가다 보니 전시가 꽤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마감이 임박한 전시도 있었다. 오늘은 꼭 미술관에 들려봐야겠다 싶었다.


미술관 입장료는 10,000원이었지만 광주시민 할인 5,000원 미술전시 관람료 할인 3,000원으로 실제 입장료는 2,000원이었다. 이 정도면 시립 미술관 수준이다. 전시는 총 네 가지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25주년 특별 기획전 데비한과 정덕현, 이유, 그리고 전환점을 넘어서란 제목의 전시가 있었다.


제1 전시장 / 데비한


데비한 셰도우피플.jpg 섀도우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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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생인 데비한은 12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UCLA미술학부, 프렛인스티튜드 석사졸업, 1999녀부터 시작된 세계 각국에서의 개인전으로 커리어를 쌓아오던 그녀는 2003년 영은 미술관의 해외작가 초빙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왔다. 이후 한국에서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데비한은 조각, 그림, 사진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나전칠기를 이용한 초상화 기법이나 실제 모델을 찍은 사진을 수작업으로 조각처럼 만드는 작품등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번 영은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섀도우 피플 시리즈가 중심을 이룬다. 이 시리즈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스마트폰에 몰두한 현대인의 실루엣처럼 보이지만, 또한 자신의 심연을 응시하는 인간의 형상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림자'를 비추어 인간의 사회적 자아와 내면의 자아, 문명과 자연, 본질과 현상이 교차하는 지점을 탐색한다. 조각상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안료는 단순한 조형요소를 넘어 정신의 정화와 감정의 씻김 그리고 내면의 회복을 상징하며 시각화한다. 작가는 인간의 모순과 결함을 숨기지 않고, 그 안에서 공감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노력, 즉 인간다움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이야기한다. _ 영은 미술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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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린 어깨로 발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가는 보는 이들의 마음 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고난이고 이 고난을 헤쳐나가는 것이 숙명이라면 섀도우 피플은 곧 자화상이리라. 어깨를 펴고 앞을 보며 또박또박 걷고 싶지만 내면의 나는 곧 어깨가 위축되고 만다. 그 위축된 몸 안에서 우글이들이 우글우글 기어 나온다. 우글이는 사념이기도 하고 인간성이기도 하다.


우글이.jpg 우글이



제2 전시장 /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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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과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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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물


정덕현 작가의 작품은 면에 먹과 호분을 사용해서 그린다. 호분이란 아카보카키라는 조개의 패각을 수 년이상 계획적으로 풍화시킨 뒤 분말 형태로 만드는 흰색 안료이다.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는 재료로 가격도 비싸지만 만들고 바르고 안착시키는 과정이 쉽지 않아 사용법 연마가 꽤나 까다로운 재료이다. 하지만 섬세한 미립자 덕에 특유의 무늬감, 푸르고 하얀 발색의 견고함이 뛰어나다고 한다. 호분에 대해 알고 보면 낯선 사물들 속 그림이 다시 보인다.


정덕현의 틀은 사람들이 각자 생각 속에 가진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작가의 틀과 관람자의 틀이 만나면서 자신의 인식구조를 자각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지금 어떤 틀속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가?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자기가 가진 역량만큼의 틀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그 틀의 확장을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제3 전시장 / 25주년 특별기획전, 전환점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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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전시실에서는 영은 미술관 레지던시에서 작업했던 9인의 작가들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미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한 중진의 작가들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확장하는 과정을 전환점을 넘는다는 제목으로 전시했다.


남경민은 화가의 작업실과 실내 공간을 알레고리적 상징으로 재해석, 이 말인즉슨 그림의 제목이 '고흐의 방'이라는 말. 색이 선명하고 그림 속에 그림을 비춘 거울이 등장한다. 이게 아마도 표면적 의미 너머에 숨겨진 상징적, 영적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 방식이라는 '알레고리적' 일 것이다.


박형주는 회화적 오브제와 색층의 누적을 통해 시간과 빛의 관계를 시각화했다. 색층의 누적이란 마크 로스코의 그림 그리는 방식을 생각하면 된다. 그와 유사한 사각형의 그림이다.


나오미 군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유하며 일상의 풍경과 개인적인 경험을 작품에 기록하는 작가로 현상 너머의 본질을 통해 삶의 의미를 성찰한다. 그는 공이라는 이름으로 거울에 그림을 그린다. 캔버스가 된 거울에는 비추는 대상에 따라 다른 그림이 될 수 있다.


이외에도 하명복, 박혜원, 정석희, 허산 박영학, 변용국 등의 그림이 있다.


제4 전시실 / 이유, 가로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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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만나 지금

'그때가 만나 지금' 연작은 붓질 흔적을 조형 언어로 삼아 '그때 거기'에서 '지금 여기'로 새롭게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붓을 캔버스에 내려놓고 진한 면의 형태가 서서히 흐려지는 선으로 넘어가다 다시 시작되는 지점은 '지금 여기'가 된다. 이 그림은 가까이서 보다 점점 뒤로 물러날수록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다. 나는 규칙적인 비구상 작품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늘 방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하나 고르라면 '그때가 만나 지금'을 고를 것이다. 이런 그림이 좋다.


회와에 대한 질문.jpg 회화에 대한 질문


'회화에 대한 질문'은 캔버스를 지지대 삼아 물감이 벽까지 넘어가는 회화의 영역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나의 회화는 선이 지닐 수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것은 경계와 질서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회화적 행위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선 가로지름 속에서 얽혀있다.

- 작가노트


가로질러 전은 '그때가 만나 지금'과 '회화에 대한 질문' 두 가지 형태의 변주로만 구성되어 있다. 반복되는 형태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단순 명료함이 이해도를 높여준다.


전시실을 돌고 카페에 앉아 카페라테를 시켰다.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섞으면 디카페인이나 일반 커피나 캡슐커피나 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카페라테 맛이 좋았다. 약간의 피로와 눈앞에 펼쳐진 가을이 커피 맛을 돋운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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