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혐오에 대해
긍정의 언어는 모두 긍정의 의미로 해석될까? 어린이를 대상으로 글쓰기 교사를 해보고 싶다는 말에 아이들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들었다. 그때 나는 조금 고민하다 애매하게 답을 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아이를 좋거나 싫다고 답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특정 계층을 좋아하는지 묻는 일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노인을 좋아하는지, 청년을 좋아하는지와 같은 질문은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린이는 예외다.
노키즈존에 대한 논쟁이 일면 그것을 찬성하는 사람 대다수가 어린이에 대한 혐오를 전제로 이야기한다. 다른 계층은 몰라도 어린이를 싫다고 말하는 것은 항상 쉽게 여겨졌다. 그렇게 해도 되기 때문이었다.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뛰어다닌다는 이유로 어린이는 호불호의 대상이 되었다. 과연 이런 이유로 사람을 싫다고 해도 괜찮은 걸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숨죽여 우는 법을 배운다. 내지는 울지 않고 우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어린이는 아직 그렇게 하기 어렵다. 본인이 왜 속상하거나 슬픈지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 알아차렸다 해도 그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이 발달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들을 타고나 어릴 적부터 잘 조절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을 거다. 아이들은 원래 시끄럽게 울고 떠들며 걷지 않고 뛰는 존재다. 아이들의 속성을 알고 이해한다면 싫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불편함을 느낄 수는 있어도 응당 이해해주는 것이 더 많이 산 자의 역할이다. 그런 어른들 속에서 자라야 아이들도 그렇게 큰다.
아이를 좋다고 말하기 싫은 이유는 싫다고 말하기 싫은 이유와 같다. 좋다고 할 수 있는 건 싫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좋다고 함으로써 그것을 싫어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 바다와 산 중 어느 것이 좋냐고 물었을 때 바다가 좋다고 하면 산은 바다에 비해 싫은 존재로 남는다. 이런 이치는 모든 비교 대상에 적용된다. 아이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얼버무렸을 때 상대는 내가 내 생각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 생각했을까 가끔 궁금해진다. 어린이 모두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싶은 마음에 생긴 공백을 그 사람은 눈치챘을까. 어떤 질문에 상대가 바로 답하지 못한다면 그건 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을 이상하게 여기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럴 때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질문을 돌이켜보는 사람이고 싶다. 긍정의 답이 돌아와도 그 이면의 숨겨진 의미를 알아채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