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키17 리뷰
미키 17은 가장 흔치 않은 행성에서, 가장 흔한 더티워커다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수노동자들을 '더티 워커'라고 한다. 도덕적, 감정적 부상이 동반되지만, 사회는 이를 당연시한다. 공장식 축산의 도축 노동자나 전쟁터의 용병처럼, 이들은 시스템 속에서 소모되는 존재다. 미키 역시 그러한 더티 워커다. 그는 끊임없이 희생되고, 새로운 버전으로 교체된다. 억겁의 고통 속에서 진행된 실험을 견딘 미키 옆에 백신을 만들어낸 연구진이나 의료진은 눈에 보이는 필수노동자들이다.
더티 워크의 핵심 중 하나는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초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 동의는 중요하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태도와 전제가 바뀔 수 있다. 예컨대, 공장식 축산에 대한 태도 또한, 비록 당장은 도축 노동자가 처한 비참한 환경을 문제 삼기보다는 '유기농'고기를 집착적으로 소비하는 쪽으로 더 기울어 있긴 해도, 바뀌기 시작했다. 사회 질서를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가 그렇듯 더티 워크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더티 워크는 법과 정책의 산물이요, 예산 편성의 산물이며, 그 밖에 우리의 가치와 우선순위에 따라 우리가 집단적으로 내리는 여러 결정의 산물이다.
익스펜더블이 여러 논의를 거쳐 지구 밖에서 허용되었던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지구에서는 인간 복제에 대해 '여기서는' 허용하지 않는 행위로 규정했다. 지구 밖에서의 행위에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에 따라 니플하임에서 같은 지구인 출신 미키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온전히 버텨야만 했다. 동시에 그런 고통은 본인이 선택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사회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가난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마카롱 산업도 미키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선택지와 기회가 적어진 미키의 처지는 익스펜더블이라는 더티워크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다. 더 나은 노동은 더 배우고, 더 높은 계층의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미키가 느끼는 트라우마와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모든 인물은 미키에게 죽는다는 것에 대한 느낌만 물어볼 뿐이다. 그가 겪은 실험이, 그가 떨어지며 느꼈던 고통이 얼마나 아픈지는 관심 갖지 않는다. 미키는 자신의 선택을 업보로 치환하며 고통을 참아낸다. 이처럼 영화는 보이지 않는 더티워커의 희생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조명하며, 미키를 통해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누군가의 희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선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던진다.
영화는 이에 대한 답을 명확히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미키가 처한 상황이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더티 워크는 법과 정책, 사회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며, 변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바꾸려면, 우리는 먼저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우리는 미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 그의 고통을 외면한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와 무관한 일이라 생각한 것에 대한 빚이다. 미키 17은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더티워커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미키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사회가 만들어낸 수많은 미키들의 상징이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가 미키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빚을 갚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또다시 묻는다.
미키, 너(나)도 행복할 수 있어
영화 속에서 미키는 '익스펜더블'로서 끊임없이 죽음을 경험한다. 그에게 죽음은 매번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매 순간이 유일무이한 종말이다. 반복된 죽음을 경험하는 영화는 많다. 예컨대, 해피 데스데이에서 주인공 트리는 17번 죽는다. 그에게서 죽음은 성장과 반성의 기회다. 미키의 죽음은 각 개체가 서로 단절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
그가 어린 시절 눌렀던 빨간 버튼과 동그랗게 떨어진 빨간 소스, 그리고 프린터를 폭파하는 버튼은 묘하게 닮아 있다. 그가 죄책감을 느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 빨간 버튼은 그의 가족을 앗아갔고, 익스펜더블이 된 이후에도 그는 이 기억 속에서 살아갔다. 하지만 반복된 죽음은 오히려 그 고통을 무디게 만들었다. 나샤와 같은 주변인들도 한 몫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미키 18은 스스로 버튼을 누른다. "그래, 나도 무서워. 인간이라는 증거지." 이 대사는 단순한 두려움의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자각하는 선언이다. 버튼을 누름으로써 이제 그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묘하게 떠오르는 이름, 뤽 베송
오래된 SF 덕후로써 기대했던 그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고, 행성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고 등등... 엄청난 핍진성과 디테일로 날 자극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봉준호 감독 영화 중 가장 많은 자본이 투입되었다는 점이 날 더욱 기대하게끔 만들었다. 실제 영화는 제법 달랐다. 아마 이러한 부분 때문에 영화에 호불호가 갈렸던 모양이다. 우주의 웅장함과 거대한 우주선보다 인간의 클로즈업으로 꽉 찬 영화를 보며,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미키 반스'라는 점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미키 17'은 뤽 베송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테마는 뤽 베송의 작품들과 맥을 같이 한다. 두 감독 모두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질문 속에서 찾은 답이 사랑이라는 것도 비슷하다. 발레리안에서 평범한 주인공들의 인류애를 통해 구원 서사를 보여준 것이 슈퍼히어로 무비와 차별화되는 매력을 보여준 것처럼, 미키 17 또한 사랑을 통해 기존 SF 무비와 차별화되는 매력을 선보였다. 특히 봉준호는 이를 단순한 낭만적 구원으로 그리지 않고, 자본주의와 계급이라는 맥락 속에서 재해석한다.
봉준호 감독은 최근 인터뷰에서 러브스토리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줄어들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그의 영화 세계가 더욱 다층적이고 복잡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 만든 SF영화에는 '때깔'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스타워즈는 가족과 욕망을, 에일리언은 여성과 어머니를, 그래비티와 인터스텔라는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히 핍진성이 높은 SF라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사회학과 선배에게 듣는 해답
봉준호 감독이 나와 같은 사회학도이기 때문에, 여전히 계급과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모습을 보여주어서 좋았다. 매번 영화관을 나오면서 느꼈던 그 찝찝함이 묘한 쾌감으로 변주하기도 했다. 미키 17은 그런 찝찝함을 원천봉쇄한다. 우리의 가능성과 인간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정말 죄송하게도 나이가 지긋한 사회학과 교수님이 생각나는 결말이 아닐 수가 없다. 동시에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이나마 아름답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도 엿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봉준호 감독 특유의 시선이 녹아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곳곳에 여러 사회적 병폐들이 녹아 있다. 하층 계급들끼리 싸우고, 계급 전복의 기회를 뺏긴 순간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삐그덕 대는 인류를 구원한 것은 결국 사랑이다. 가진 것 없는 미키가 니플하임에서 배웠던 것은 계급적 무력감뿐만이 아니다. 도로시의 통역기에 담긴 윤리와 나샤의 진득한 사랑이 있다. 그동안 미키의 속에 알게 모르게 쌓인 사랑은 그가 가진 유일한 것이며, 가장 큰 것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는 말한다. 당신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죽어가는 사회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마 사랑일 것이라고. 사회학적 질문들에 대해 머리를 싸맸던 나에게 선배의 대답을 듣는 것 같았던 영화, 미키 17에 대한 리뷰를 여기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