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다. 컴퓨터 그래픽 없이 만들어진 경이로운 영상미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이유는 '이야기'라는 본질에 있다. 우리는 왜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나누는가.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할 수도 있을까.
영화의 주인공 로이는 스턴트맨이다. 그는 영화 촬영 중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사랑하는 연인마저 떠나버렸다. 절망 속에서 그는 삶을 포기하려 하지만, 병원에서 만난 소녀 알렉산드리아와 가까워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섯 명의 무법자가 악당 '오디어스'를 찾아 떠나는 모험담.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로이는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무법자 중 하나로 투영하며, 알렉산드리아의 상상력을 빌려 점점 더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가면서 그는 점점 더 절망에 빠진다. 결국 이야기 속 영웅들을 하나둘씩 죽이며, 자신도 죽음을 택하려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필사적으로 로이에게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라고 애원한다.
"그를 살려줘요."
결국, 로이는 삶을 이어간다.
영화는 절망 속에서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변화시켜 가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 완성된다. 알렉산드리아가 없었다면, 로이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있었기에 이야기는 새로운 결말을 맞이한다.
이 영화가 한국의 관객들에게 특별한 울림을 준 이유도 여기 있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잘 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자본주의는 일정 궤도에 오른 이후에 병폐를 드러내고 있고, 손쓸 수 없이 병들어가는 사회 속에서 젊은 세대는 미래를 기획할 수 없다. 당장 지구의 500년 후를 떠올린다면 '인류의 번영'이라는 키워드보다 '지구멸망'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만남보다는 이별을, 상승보다는 하강의 경험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리오타르는 현대 사회를 포스트모던이라 정의하며 '에픽'의 종말을 지적했다. 인생을 걸 만한 거대 서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앞선 세대가 모든 걸 이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에 대한 이야기다. 자살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조망한 뒤르켐의 이론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연대가 해체되면서 현대인은 더욱 고립되고 허무 속에 빠진다. 더 폴은 이러한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영화'를 말한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오랜만에 절실하게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더욱 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 친구들이 모두 이 감정을 느끼길 바랐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뒤에 살고 싶다는 걸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동시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보다, 이 영화 한 편이 더 깊은 구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에 기대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