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생 Dec 16. 2022

30대 미혼인이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류시화의 퀘렌시아 -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제 곧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30대 미혼 남성에게 결혼식 참석은 이제 슬슬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뭔가 괜히 위축되는 느낌도 받는다. 초중고대 그리고 취업까지는 분명히 내 노력 여부에 따라 제도권(여기서는 결혼을 의미한다, 이제는 기득권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안에 안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라도 있었는데. 결혼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 내 마음대로 되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나는 제도권 밖의 사람처럼 느껴져서 괜히 위축되는 느낌을 받는다. 심지어 이제는 결혼한 사람들이 대단해보이기까지 한다.


  1인 가구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이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난 내가 이 나이까지 미혼일 줄은, 거기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조차 못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솔직히 이제는 점점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 결혼식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외롭고 힘들게 느껴지니까. 소개팅 실패 후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무튼 그러한 직장 동료의 결혼식에서 직장 동료 아버님께서 축사를 하셨다. 평소에는 남의 결혼식에 가서 축사를 잘 듣지 않는 편인데(결혼식에서 제일 중요한 건 맛있는 밥 아닌가), 그날따라 귀에 꽂히는 멘트가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버님께서는 두 사람이 가정을 꾸려 사랑하고 배려하며 두 사람만의 퀘렌시아에서 행복하기를, 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퀘렌시아라는 단어는 최근 류시화 시인의 시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서 보았었다. 류시화는 퀘렌시아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구나,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어 퀘렌시아를 이룩하는 것이구나. 그동안 결혼이란 뭘까하고 어렴풋이 고민만 했던 내게 축사는 깔끔한 대답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 지난 연인들 중에는 함께 퀘렌시아를 이룩할만한, 혹은 그러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어떤 사람은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아서, 어떤 이는 이성적인 매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어떤 이는 경제적 관점이 달라서. 다양한 이유로 헤어졌었고, 퀘렌시아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사람은 없었다. 씁쓸했지만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사람을 아직 만나지 않아서 미혼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다행이긴 하지만 몇몇 연인들과 헤어지고 나니 스스로에 대한 자책도 든다.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지 화살을 내게 돌리게 된다. 나는 그 전 연인들에게 퀘렌시아를 이룩하고 싶은 사람이었을까? 생각해보건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 스스로에게만 너무 집중하고 있던 나머지, 결혼 생활의 필수 조건인 희생에 관해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내 생활 습관과 패턴에 그녀들이 맞춰주기를 바랬고 나와 다르다면 이별을 선택했기에. 이렇게 이기적이었고 사랑을 지키려는 노력이 없었던 나는 아직도 미혼인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들은 축사를 통해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결혼은 두 사람만의 퀘렌시아를 이룩하는 것.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먼저 배려하고 내 삶의 일부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야, 비로소 두 사람만의 퀘렌시아를 이룩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그러지 못했고 앞으로는 그러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더욱 내 삶에 집중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내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남의 삶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그를 위해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노력으로 되지는 않으니, 노력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삶이 사랑스러운 삶이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일은 내 삶이 아니다 - 조용한 사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