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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IDI Jul 31. 2016

|Review| 사회, 모두가 아는 그 공포

Movie | 오피스 (2014 필름)

오피스 (2014 필름)

홍원찬 감독



오피스 / 포스터




오피스 / 포스터 (해외용)














회색빛 풍경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슬픈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마치 한편의 흑백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출근길 내내 모든 풍경이 회색빛이였다. 사실 흑백의 무성영화는 고전이 주는 낭만이라도 있지만, 내가 본 그 영화는 소리도 없고 색채도 없는 공포물에 가까웠다. 회색빛 풍경 위로 무표정의 얼굴들이 가득하고, 검붉은 혈흔 대신 각양의 발자국만 낭자한 그 공포영화는 아직도 절찬리에 상영중이리라.


오피스 / 영화 화면 캡쳐

어느 날 이른 아침, 첫 직장으로 처음 나선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선 버스 안에서 난생 처음 본 광경에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버스 안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답답했는데, 단지 사람이 많아서 느끼는 답답함만은 아니였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신기하게도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모두 같은 얼굴이였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사람, 태플릿 PC로 프레젠테이션을 확인하는 사람, 이어폰을 귀에 꽃고 음악을 듣는 사람, 좌석에 기대 잠시 눈을 붙이는 사람, 그저 멍하니 있는 사람 등 버스 안의 사람들은 참 다양했지만 모두 하나같이 아무런 표정이 없는 똑같은 얼굴이었다. 환승한 지하철에서 계단을 올라가 빌딩숲 사이의 거리를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토록 섬짓한 광경을 매일 아침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내가 느낀 감정은 처음엔 공포였지만, 갈수록 슬픔이 가장 뚜렷해졌다. 소위 '사회'라 불리는 이 슬픈 풍경에 익숙해지기까지, 한동안 나는 출근길 버스안에서 몰래 눈물을 삼키느라 아침마다 목이 메이곤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오피스 / 영화 스틸컷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혈흔이 낭자하고 잔인한 보통의 공포영화로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날카로운 흉기에 피가 사방으로 튀기도 하지만, 그런 장면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내게 소름 돋을 만큼 정말 공포스러운 장면은 따로 있었다. 직장 내 점심시간, 인턴 '미례'는 과장을 데리고 오겠다며 팀원들보다 뒤늦게 사무실을 나선다. 거절하는 과장을 데리고 오지 못하고 홀로 나와서, 팀원들이 모여 있을 식당을 물으러 전화를 걸어보지만 그 누구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문득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표정이 묘하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물씬 풍긴다. 고립감, 외로움, 처절함 그리고 혼란스러움 같은 공포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느끼는 공포는 화면 너머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유사한 공포감을 경험해 본 나로서는 이 영화의 전체를 통틀어서, 이 장면이 가장 무섭고 끔찍했다. 


오피스 / 영화 화면 캡쳐

'미례'가 느낀 공포의 대상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상이 아마도 '사회'라 불리는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란 광범위한 개념이지만, 사전적 의미로 축약하면 공동생활의 모든 형태(자의적 해석)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처음 경험하는 사회는 '가정'이란 말도 있지만, 가족 중심적인 한국에서는 가정을 진정한 현실 '사회'와 유사하다고 보기 힘들지 않은가. 가족을 타인으로 인식하지 않는 통상적인 한국의 가정(일부 비인간적인 가정의 행태는 잠시 논외하고)에서 애정을 기반으로 만나는 비교적 관대한 '사회'와 수많은 타인으로 구성된 학교나 직장같이 경쟁을 기반으로 만나는 냉정한 '사회'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마주하는 공포를 흔히 말하는 왕따같은 단순한 따돌림의 문제로만 인식한다면 큰 오산이다. 바삐 움직이는 인파 사이에서 홀로 멈추어 뒤돌아 보고 있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어쩔 수 없다'는 무심한 말로 회피하고 싶지만, 나 역시 사회의 일부분에 속한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일말의 책임감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쳐보라. 부끄럽지 않은가. 

 














당신도 알고 있다


오피스 / 영화 화면 캡쳐

홧김에 사표도 내던지고 나왔건만, 여느때처럼 어김없이 꽉 막히는 퇴근길의 택시 안에서 홍대리의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린다. 해외 여행 중 찍은 사진을 띄워놓은 흔하디 흔한(직장인이라면 으레 한번쯤은 해봤을법한) 핸드폰 배경화면 위로 메세지 알림이 보인다. 명치에 걸려 있던 양심을 쏟아내고 나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메세지 속 부장이 꺼낸 '승진'이란 단어는 간만에 사람답게 보였던 홍대리 얼굴에 다시 그늘을 드리운다. 하지만 그 누가 홍대리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오인으로 발포된 총알이 자존심도 숨기고 어렵게 얻은 승진에 금을 내버릴까봐, 그저 씁쓸하게 미소만 짓는 형사를 보며 그 누가 명쾌하게 할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 '홍대리'나 '형사'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오피스 / 영화 화면 캡쳐

살인을 당하는 사람의 눈에 이미 세상에 없는 김병국 과장이 보인다. 귀신이 보이는 현실이든, 두려움에서 비롯된 상상이든 팀원 모두 살기 가득한 김과장을 만난다.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꼭 알맞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김과장에게 느꼈던 일말의 어떤 죄스러운 감정이 투영된 것이리라. 그래. 분명 모두 알고 있었다. 단순히 '미례'에게만 국한된 공포가 아닌 것이다. 이기심 혹은 두려움에 모른 척 해봐도,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공포에 파묻혀 고통받게 될 뿐 이다. 모르는게 약이라는 속담이 뼈저리게 공감이 간다. 하지만 당신은 모르지 않는다. 앎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겠는가. 나도, 당신도 알고 있다. 

















같이 아프다


오피스 / 영화 스틸컷

병원의 주사실 안, 피부에 바늘이 닿기 전에 간호사의 따끔한 손길이 먼저 닿지 않는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감소되었는지 떠올려보면, 사실 큰 효과가 없었다는 생각에 의아하다. 그러한 마찰이 신체의 긴장을 풀거나 고통을 분산하려는 시도로서 심리적인 영향은 끼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바늘의 물리적인 자극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가는 건, 어떠한 예방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단 무조건 아프다. 실제 물리적인 '고통'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주사실에서 찰싹 하는 마찰음 없이 몸에 바늘이 먼저 닿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적잖이 당황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사람은 실제적인 '고통'에 별반 영향을 끼치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착각시키거나 고통의 '심리'를 분산시키기 위하여 전혀 상관없는 또 다른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오피스 / 영화 화면 캡쳐

안타깝지만 나는 '사회'로 인한 물리적인 '고통'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모른 척 해봐도 실제 물리적인 이 '고통'은 절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포'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공포물이 되고자 자처하며 다른 누군가('미례'나 '김과장'같은)에게 내 '고통'의 이 전가되리라 기대해봐도 아무 소용 없다. '고통'을 아는 그대, 왜 스스로 공포물이 되려 하는가. 주사를 맞아야 한다면, 바늘이 내 살을 뚫을 것은 당연하며 그로 인해 아플것이다. '고통'은 그저 '고통'으로, 무엇으로 가린들 가리워질 수 없지 않은가. 응당 아파야 한다. 그냥 아프자. 


오피스 / 영화 스틸컷

우리 함께 아프고, 함께 아파하자. 아무리 여럿이라도 결국 혼자인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치료나 위로를 바라기보다 그냥 같이 아픈 것이 낫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아프다. 같이 아프자. 같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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