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세계관
사람들은 각자의 삶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살아간다.
나는 삶의 기준을 세웠다. 그 이유는 세상이 너무 험난해서이다. 사랑이 없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사랑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유 때문에 결과가 생긴 것은 아니다. 내가 삶의 기준을 세워보니,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이런 이유였다. 나는 진심으로 이 세계관을 믿고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것은 아마 내가 꿈꾸는 세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는 하나의 물질이다.
나는 지구에 있는 물질들 중 하나다.
나는 지구에 존재하는 어떠한 물질이다.
우리는 지구에 존재하는 물질들이다.
우리는 하나다.
지구는 나다.
지구는 우리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떠한 존재를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사랑하면 그것과 나의 호흡이 같아진다. 그것의 고통을 내가 느낀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내가 된다. 사랑은 자신의 신체를 넓히는 것이다.
지구는 우리다.
사랑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애초에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의 신체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감정은 하나가 되기 위함을 상대방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하나가 되었을 때 벅차오른다. 하나가 되지 못했을 때 슬픔을 느낀다.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방식이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그 존재가 사라졌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구의 일부일 뿐이다. 내가 죽어도 지구는 돌아간다. 지구에게 나의 존재는 너무나도 작은 단위의 존재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내가 죽어도 지구의 어떠한 물질 중 하나로서 존재한다. 죽으면 지구 구성 중 일부가 된다.
죽어도 존재한다. 죽음은 피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는 하나다.
육식과 채식은 본능이다.
결국 자기 기준에서 그것 또한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뇌가 없으면 신경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과 아픔은 가짜다.
지구는 하나다.
나의 눈은 나의 구성 물질 중 하나이다. 나는 지구의 구성 물질 중 하나이다. 나의 눈은 지구다.
나는 지구의 한 면에 존재한다. 나의 눈은 검은 자로, 한 면 밖에 보지 못한다.
내가 보는 것은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지구는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우주일 수도 있다.
2. 현실
‘현실적으로 불가능 해.’
나는 가끔 ‘현실’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이 아니라, 단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느낄 때다.
현실에서 현 순간을 온전히 느낄 때. 나에게 그것은 특히 자연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감이 대체로 예민하다. 눈의 시야가 넓어져서 현재 공간이 광각으로 보이거나, 귀가 예민해져서 안 들리던 소리들이 크게 들리거나, 좋은 향을 맡거나, 맛있는 것을 먹었거나. 그 순간에 ‘살아있다’라는 느낌이 들면서 정말 큰 행복감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느껴진다.
정말 어떠한 것에 ‘몰입’을 했을 때, 그 ‘심리적 시간’이 남들과 다르게 갈 때는, 그 시간이 느리게 가거나 특정 감각이 ‘죽는’ 느낌이다. 등산을 한다 거나, 신체적 운동을 할 때 특히 그렇다. 나의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게도 느껴지고, 특정 부위의 감각을 제외하고는 다른 감각들이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운동을 하다 다쳐도 모르는 경우가 그렇다.
현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지금 실제 사실로서 존재하는 일이나 상태’라고 되어있다.
물론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실제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의미는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실제 사실’이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 관점에서 판단하면 ‘자신이 아는 정보 내의 진실’이라는 말인데, 자신이 우물 안에서 살고 있을지 어떻게 아는가?
누군가에겐 SNS 세상이 더 중요해서 자신이 현실보다는 조금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상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보편적인 현실보다 애니메이션 세상이 더 현실처럼 느껴져서 미미짱을 실제로 사랑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현실의 ‘정말 실제 사실이’, 마치 영화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과학자를 포함한 인간이, 아직 밝혀내지 못한 사실들은 수두룩하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어느 시점’ 이후로, 하나의 현실을 가지고 그 상태로 계속 살아간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자아가 강해진 경우에 ‘내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해는 이랬고~…’ 같은 판단으로, 그 정보에 대한 배움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성격이 유연함에 따라 그 자아는 휘어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실을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이 믿는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 혼란스럽고, 그 세상이 무너진다고 느끼는 것이다. 위험을 느끼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다.
인간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 원자핵의 크기는 ‘100조 분의 1m’의 크기인데, 원자핵과 전자를 빼면 그것이 텅텅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몸의 원자와 전자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을 모두 뺀다면 인간은 ‘실제로’ 먼지 만해지고, 지구의 80억 인구를 모아봤자 사과 하나의 크기와 같다고 한다.
물질적으로 따지면 인간의 몸에 텅 빈 공간이 99.9999..%라는 말이다. 우주도 그렇다. 우주의 만물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 사이에 있는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란다. 현실은 무엇일까. 우리는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지만, 그것은 전부가 아니고, 사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들은 모두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거의 공간이고, 심지어 그 공간이라는 것은 물질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눈을 통해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삶도 시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말은, 실제로는 ‘다른 의미’ 일 수도 있다. 그것들 또한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가 약속하고 정한 개념이고, 그것의 의미를 나의 생각과 나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죽은 자의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사후세계를 몰라서 존재하고,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만약 죽어도, 죽은 것이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끝’이 아니라면, 그것들의 의미는 사라진다.
‘신기하네. 근데 이걸 안다고 뭐가 달라질까. 내 현실이랑 상관없는 이야기 아닌가?’
우리는 지금도 크고 작은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현실일 것이고, 누군가는 명예, 누군가는 가족. 이 ‘삶’이라는 것에 따라, 그 양식과 의미에 따라서 우리의 목적은 바뀔 수도, 더 확고해질 수도 있다. 나의 목적이 아무 의미가 없어질 수도, 더 가치 있어질 수도 있다.
나는 그랬다. 이러한 세계를 생각하니까, 좀 더 나를 위한 선택을 하고 나를 존중하는 용기가 생겼다. 내가 ‘나의 현실’을 구축하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은, 나의 현실엔 단지 ‘내가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자아가 강하다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을 인정을 하고 살아가는 듯하다. 그 세상을 모르지만, 모르는 것에 대한 겸손과 소심이 존재한다. 그리고 소심하게, 기회를 틈타서 울음소리를 내곤 한다.
현실의 양식에 따라,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수도 있다.
생각하는 현실이 무엇이며,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이며 불가능은 언제까지인가? 당신의 그 현실은 당신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인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누구길래, 지금 그 현실에 있나?
우리는 잘 살기 위해 ‘현실적으로’ 살아야 한다.
당신의 현실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