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사용법 / 무게중심

by 장지영

1. 신체 사용법


걷는 법, 말하는 법을 다시 배웠다.


연기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전문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를 ‘0’으로 만들어야 했다. 습관을 없애고, 몸을 바른 자세로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20년이 넘도록 사용했던 나의 신체는 생각보다 더 뻣뻣했다. 어깨는 말려 있었고, 골반은 거의 열려 있지 않았으며, 걸음걸이는 가짜 자존감으로 덮여 있어서 우스꽝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그리고 평소엔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심지어 신체는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과학적이고 정확한 과정을 거쳐서 작용되는 ‘발성’은, 사람이 환경에 맞춰서 진화하는 것처럼, 내가 20년간 소리 냈던 방식에 맞게 형성되어 있었다. 듣기 싫은 콧소리가 나기도 했고, 높은 음정의 소리를 낼 때 목이 갈라지며 쉰 소리가 나기도 했다. 큰소리를 내려고 하면 목에 힘이 들어가 목줄을 찬 오리처럼 꽥꽥댔다.

겉으로 보이는 자세는 눈으로 볼 수 있고 정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다 쳐도, 목소리는 보이지도 않는다. 스스로 나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내가 느끼는 소리와 남이 듣는 소리, 녹음된 소리가 달라서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되는지 너무 혼란스러웠다.


신체의 본질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양한 훈련을 통해 몸을 사용해 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되면서 나의 몸에 대해 좀 더 이해하게 됐다.


신체는 뇌를 통한 정확한 과정을 거쳐서 움직여지고, 근육은 ‘필요에 의해’ 사용된다. 나의 모든 신체적 움직임은 내가 어떠한 욕구를 가진 채 목적을 가져야 그 자체가 자연스러웠다.

예를 들어 사과나무의 사과를 딴다고 할 때, 사과를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고, 사과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사과를 뻗는다. 세부적으로는 등 근육부터 어깨근육, 팔에 있는 근육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손마디의 근육들이 움직여 사과를 잡고, 또다시, 이번엔 조금 더 등 쪽에 있는 근육들이 사과를 잡아당기라는 명령을 내린다.

사과를 잡아당긴다.

눈으로 새빨간 사과를 보며, 얼굴의 근육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하얀 이를 드러낸다. 동시에 기분이 좋아져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폐에 들어왔던 호흡이 깊숙한 곳부터 나가기 시작하더니, 목에 있는 성대를 지나 빠져나간다. 또 그와 동시에 뇌에서는 ‘맛있겠다고 말해’라고 명령을 내리고, 뇌가 명령을 내리면 내리는 대로 순식간에 성대는 접지, 접촉면이 닿으며 진동한다. 진동에 맞게 ‘목소리’라는 것이 나고, 입모양과 혀는 움직이며 발음을 한다.

“맛있겠다.”

빠져나가는 호흡이 ‘맛있겠다’라는 소리에너지로 변화했다. 사과를 먹는다. 혀와 입에 있는 근육들이 움직인다….


생각은 정말로 신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몸은 정말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저항’이라는 것도 생긴다. 신체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자극에 반응한다. 그럼 ‘멈추기 위해’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의 몸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몸을 보호하는 것은 모든 생명들의 본능이다.


생각은 신체를 움직이게 만든다. 근육은 필요에 의해 사용된다.

생각이 저항하면 근육이 저항한다.

겁먹지 않으면, 근육이 저항하지 않는다.


때로는 ‘저항’이, ‘불필요한 힘’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넘어지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넘어지지 않으려 한다. 넘어지면 물론 아프지만, 넘어지기도 훨씬 전에 넘어진다고 판단을 한다면 신체가 우스꽝스럽게 반응하며 더 세게 꼬꾸라질 것이다.


자신감이 있는 상태는 저항이 없는 상태다.

겁을 먹지 않고 신체에 저항을 주지 않은 채, 스스로에 대한 확신대로 몸을 움직인다. 그럼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로 적당한 힘이 근육에 작용하고, 부드럽고 단단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신체를 움직일 수 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신체 내부는 보이지 않는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말을 하고 소리를 낼 때도 불필요한 힘들이 내부에서 작용한다. 하지만 그것들도 역시 동일하게 작용한다.


이것은 어렵다. 어느 정도의 힘을 줘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고,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신체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진다. 자신의 근육이 얼마나 형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이완되어 있는지에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힘을 줘야 하는지, 빼야 하는지 판단해야 한다.

개인의 몸을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힘의 '최솟값'을 사용해야 한다.

컵 하나를 들어도 그 무게에 필요한 근육의 힘이 있는데, 우리는 보통 그 근육의 긴장 정도가 컵을 들기 위한 무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들이며, 그것을 소모하고 살아간다. 그것은 많으면 실수를 유발하고, 적으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감명을 주지 못한다.

정말 필요로 하는 실질적인 에너지를 적당하고 섬세하게 사용하려면, 오히려 더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익숙하게 작용한다면,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몸을 사용할 수 있다.


긍정적인 생각은 몸을 발전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생각이 경직되면 그것은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몸의 경직으로 바뀐다. 하지만 좋은 생각은 많은 호흡을 몸에 제공하고, 복식호흡을 하도록 만든다. 마치 넓은 들판에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내뱉는 것과 같다. 긍정은 몸에 가장 적당한 힘을 들이도록 하며,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몸이 저항하지 않게 하고 한계를 부수도록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손해’다.

스트레스는 인간의 몸을 경직되게 만드는데, 불필요한 몸 근육의 사용은 피로감을 주고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될 에너지를 사용한다. 몸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몸의 스트레스를 조절해야 하는 이유이다.


긍정적으로 자신감을 가지려 노력하면서, 일상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신경 쓰고 걷고, 신경 쓰고 말했다. 나의 모습을 1인칭이 아닌 2인칭이나 3인칭으로 바라보며 걸었고, 상대방에게 ‘들려주기 위해’ 말했다.

자세가 바뀌고, 목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의식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신체가 더 잘 느껴지게 됐고, 나의 목소리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더 잘 알 수 있게 됐다. 물론 과거와 비교했을 때는 내 기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가끔은 필요 이상의 힘을 주어서 움직임과 말하기가 경직되기도 하고, 과하게 이완시켜서 제 기능을 못하기도 한다. 여기서 노력을 멈춘다면, 그 멈춤이 지속되면 될수록, 나의 움직임과 말하기는 안 좋아지거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신체는 생각을 바꾸고, 생각은 신체를 바꾼다.

이 귀찮은 것을 평생 해야 한다. 신체는 살아있는 동안 죽지 않기 때문이다.



2. 무게중심


스트레칭을 통해 몸의 유연성과 가동성을 늘렸다. 호흡과 몸 근육의 이완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나는 정말, 스트레칭을 하면서 삶의 관점이 크게 달라졌다.



우리는 신체의 모양을 보고 무언가를 느낀다.

하늘을 보는 모습은 자유, 꿈 또는 허탈, 공허.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 있는 자세를 보면 아픔, 절망, 그리고 방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 우리의 신체의 모양들은 그 목적에 대한 과정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을 행위예술처럼 본능적으로 몸을 통해 표현하게 된다.


난 지금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아직 25년, 정도의 수치밖에 살지 않았다. 많고 적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이 표현하는 많은 몸의 ‘행위예술’들을 보고, 과거 조상들이 가졌던 다양한 몸의 모양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거기엔 종교에 대한 모양들이 많다. 기도를 하는 모습, 절을 하는 모습. 영화 <버닝>에서 전종서 배우가 췄던 춤과 같이 특정 문화에 대한 모양들도 있다.


'요가'에서는 여러 가지 동작을 통해, ‘수련’을 한다고 말한다.

약 1시간 동안 좁은 매트 위에서 다양한 신체의 모양들을 만들어 낸다. 그 동작의 모양들을 완성하기 위해 수준 높은 신체 능력도 필요로 한다. 요가는 신앙으로부터 출발했고, 동작의 이름들은 신들의 이름이다.

요가에는 실제로 많은 ‘경전(經典)’들이 있다. 난 25년을 살았지만, 그 경전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숫자와 시간을 합한다면 실로 엄청날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그 이론들을 만들어낸, 또는 ‘알아낸’ 것이, 신체에 대한 엄청난 공부와 노력을 들인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요가가 아니더라도, 존재하는 문화와 스포츠 등을 통해 많은 삶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실제로 그중 하나에 빠져서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다반수이다. 그것의 진짜 매력을 알기만 한다면 많은 것들이 무엇이든 의미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많은 신체활동들은 뜻이 깊다. 그것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 정확하고 뜻깊은 진리를 준다.


우리의 몸 또한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결코 어떤 것으로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없으며, 신체로 하는 모든 활동에 대한 정서(情緖)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자신에 몸에 대해 단순하다고 생각하고 단순하게 살아간다면, ‘단지 ‘요가’라는 것이 존재하는구나’하며 얕은 삶의 깊이에 머물러서 다양한 가치들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근육은 이완과 수축을 한다. 그것은 뇌를 통해 이루어진다.

몸은 예민하면 예민할수록 잘 느낄 수 있다. 나의 호흡의 들숨 날숨 그리고 특정부위의 근육을 동시에 인지하면 그 부위의 근육이 이완되고 수축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신체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고 뇌를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모든 신체는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스트레칭을 권장하는 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이해하고, 지구의 중력과 나의 무게중심을 유지한 채 살아가야 한다.


요가를 가르치는 친구에게 물어봤다. “요가가 왜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친구는 엄청 밝고 초롱초롱하게 말했다. “요가가 ‘삶’과 같은 것처럼 느껴져.”


“수련을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야. 1시간 동안 좁은 매트 한 장위에서 많은 감정들이 느껴지는데, 1시간이 삶을 축약해서 사는 기분이랄까?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는데, 머리부터 발 끝까지 안 쓰는 근육이 없어. 그리고 마음의 걱정이 있을 때는 내 자세도 같이 흔들려. 왜냐하면 나의 중심이 흔들리는 거거든.”

'중심.'

사람의 중심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언제나 흔들린다. 하지만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사람을 우리는 단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느낌은 안정감, 어떤 상황에도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뚝심.


“요가에 ‘다르마’라는 용어가 있는데, '과정이나 해야 할 과제'를 말해.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그대의 다르마에 집중하라.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야. 인생도 똑같은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그 와중에도 막상 눈앞에 통제를 벗어난 흔들림이 생기면 당황하고 욕심이 생기게 된다.

신체를 통해 모든 결과에 대한 집착을 놓아준다. 그리고 그 느낌대로, 눈앞의 것들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더 결과가 좋아지지 않을까.


“요가 자세가 얼핏 보면, 처음에 시체 모양, 그리고 태아 모양, 앉은 자세, 그리고 다시 나. 이렇게 돌아가는 것 같다? 마지막에는 ‘사바사나’라고, 다시 송장(시체) 자세야. 이 마지막 휴식하는 자세가 달콤하기 위해서는 수련이 더 힘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내가 열심히 살수록 나중에 죽음이 더 달콤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들리고, 무너지기도 한다.

정신이 흔들리면 신체도 흔들리고, 신체가 흔들리면 정신도 흔들린다.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서 지구의 중력을 느끼고 나의 무게중심을 느낀다.

그것을 그 상태로, 그 줄을 놓지 않고, 최대한 지구와 나 사이의 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곧 나의 삶을 살아가는 ‘지구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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