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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오사카, 인생의 틈에서 만난 친구, 조박사.

말이 필요 없는 시간. 가끔은 이런 시간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긴다.

by 하인즈 베커
Walkman , 산책하는 인류 / 하인즈 베커 사진


산노미야의 아침은 무척 조용했다. 나보다 먼저 깨어난 햇살이 커튼을 타고 흘러들었고, 나는 짐을 싸고 숙소를 나섰다. 전철은 어김없이 정확하게 도착했고, 나는 그것을 타고 오사카역으로 향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거리. 커피 한 모금 없이도 기분이 들떠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오늘은 조박사를 만나는 날이었다. 그가 김포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


어서 오세요, 조박사님 / 하인즈 베커 사진



JR 오사카역 3번 빌딩 입구에 도착해 서성이는데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오고 있었다. 작은 키, 덩치만 한 백팩, 닥터슬럼프 같은 안경, 그리고 약간은 방향을 잃은 듯한 걸음걸이. 조박사였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몇 번이나 같이 다녀도, 그는 늘 목적지 앞에서 잠시 길을 잃는다. 허둥지둥 내 앞에 도착한 그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김포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스물네 시간은 지난 느낌이야.” 그 말에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편한 신발을 하나 살까 했는데 왕발이 문제 / 하인즈 베커 영상


함께하는 세 번째 일본 여행, 조박사는 여전히 똘똘한 엔지니어이자 걷는 백과사전이며, 이제는 확실히 실패한 ‘짭텐도' 의 망령에서 벗어나 인생을 실험하는 인간이었다. '드래곤보트' 국가대표이기도 한 그는 당뇨가 여전히 갚을 수 없는 빚으로 남아있지만. 복싱, 드럼, 탭댄스를 모두 즐기며, 한문과 일본 역사에 능통하다. 교토에서는 남들 다 가는 청수사가 아니라 일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교토대 교수의 연구실로 향하고 내가 잠든 밤에는 사카모토 료마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신센조가 되어 교토의 밤거리를 순찰한다. 그런 친구가 아침 일찍 공항에서 날아와 내 앞에 서 있다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였다.


어김없는 110엔 생맥주 / 하인즈 베커 사진
1969 조박사와 한 끼 / 하인즈 베커 사진


오랜만의 재회에는 의식이 필요하다. 내 단골집, 오사카역 빌딩 지하의 ‘1969’로 향했다. <내일은 조> <타이거 마스크> 만화책과 익숙한 메뉴판이 반겨주었다. 110엔짜리 생맥주 두 잔을 시키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맞댔다. 도시의 소음도, 여행의 설렘도, 그 순간엔 모두 맥주의 거품처럼 사라졌다. “자, 그럼 이제 뭐부터 할까?” 조박사가 물었다. 나는 되물었다. “지도를 볼 거야? 오늘도 네 감을 믿을 거야?”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도는 내게 있어선 제일 나중에 꺼내는 무기지.” 우리는 그 무기를 쓰지 않기로 하고, 감에 맡긴 채 골목을 걷기로 했다. 마침 바람이 좋았고, 하늘도 맑았다.



JR 오사카역 / 하인즈 베커 사진


오사카 역 코인로커에 배낭을 넣어두고 걷는다. 사방으로 이어진 골목은 마치 각각의 이야기책처럼 펼쳐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늘 새로운 문장을 만났다. 조박사는 전자상가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말했다. “덴덴타운은 내게 있어선 과거지사야. 그 게임기… 그때만 생각하면…” 나는 말을 끊었다. “그 얘기, 그만. 오늘은 할 일이 많아. 고야산 작전도 짜야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철을 타고 쓰루하시로 향했다.


쓰루하시, 야키니꾸 - 조박사와 / 하인즈 베커 영상


쓰루하시. 언제나 그렇듯 냄새가 먼저 반겨주는 동네였다. 고기 굽는 냄새, 쯔케다레 냄새, 그리고 숯불이 남긴 자취 같은 것들이 골목을 점령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냄새를 따라갔다. 한때 조선인의 땀과 생계가 겹겹이 쌓였던 그 거리에는 여전히 ‘살아 있음’이 증류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골목길에 세워진 자그마한 불판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낮술로 달궈진 속에 곱창, 호르몬, 간 천엽을 노미호다이 생맥주와 마신다. “이 동네는 뭔가…” 조박사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대신 말했다. “응, 뭔가 말이 안 되는 감정이 들지.” 조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창 한 점을 뒤집었다.


우리 앞 접시에는 벚꽃같은 봄이 차려져 있었다. 도심 속에서 이런 묘한 감정을 맛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여행의 가장 은밀한 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는 시장 상인들이 손님을 부르며 왁자하게 소리를 쳤고, 그 소리에 섞여 조박사가 중얼거렸다.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마음은 007, 현실은 전철맨 / 하인즈 베커 사진


두 번째 점심을 마치고도, 우리는 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그 골목의 햇살과 연기와 소리들, 그 모든 것이 어딘가 ‘머물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벽에 붙은 오래된 포스터 하나를 바라보았고, 조박사는 구석의 불탄 듯한 나무기둥을 만지작거렸다. 오랜 친구와 함께 하는 말이 필요 없는 시간. 가끔은 이런 시간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긴다. 그렇게 우리는 오후 한때를 쓰루하시에서 천천히 태웠다. 도시의 시계는 분명히 흘렀지만, 우리만은 그 틈을 벗어난 듯했다.





https://maps.app.goo.gl/wUBoda6U95P8AB1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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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보보다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 편씩 나눠서 읽으셔도 좋지만, 소설처럼 처음부터 천천히 읽으셔도 좋습니다. 첫회 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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