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 계절 시학(季節詩學) : 겨울(冬) ] 篇 ( 86 )

• 오탁번 설날 아침의 화선지 한 장

• 김이듬 날마다 설날

• 서정주 나룻 목의 설날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 [ 그림 에세이 ]

-- 분홍빛 꽃 만발한 설날 <외가집 추억>


• 엘리자베스 키스 작, <정월 초하루 나들이>,

목판화, 38 x 26 cm, 1921년 작






설날 아침의 화선지 한 장




오탁번





감나무 가지에 아스라이 매달렸던


까치밥도 어느새 동이 나고


밤새 함박눈이 쏟아져서


단군 할아버지의


무명 두루마기처럼


아이들의 남루와 헐벗은 나뭇가지를 덮으면


손꼽아 기다리던 설날은


흰 화선지 한 장 크기로


문뜩 밝아오는 것이다




고드름이 뚝뚝 떨어지는


설날 아침이 되면


세배돈 몇 닢 쥔 고사리 손은


겨울 바람에 시리지만


잣눈이 내린 밭두렁 위의 까치처럼


한 살 더 먹은 설날의 아이들은


까치걸음으로 눈밭을 내달리며


이까짓 추위 쯤 하며


아주 씩씩해지는 것이다




부럼 깨무는 보름이 오면


가지에 돌을 끼워서


대추나무 시집도 보내고


동무들과 연날리기를 하면


단군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옷고름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연 꼬리를


이마에 손을 대고 바라보는


마늘쪽 같은 아이들의 작았던 키도


쑥쑥 자라나는 것이다




인터넷 바다에서 온갖 정보를 체크하고


바라보는 한강의 하늘에는


그 옛날 설날 아침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단군 할아버지가


깜냥껏 그려보라고 건네준


흰 화선지 한 장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 위에 크레용으로 그렸던


거짓말 같은 아이들의 미래가


정말 펼쳐지는 것이다





-- 시집 [손님] (2006)







• 시인ㆍ대학 교수 오탁번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 석ㆍ박사학위 취득

--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동화 <철이와 아버지> 당선

--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詩 부문에

詩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당선

--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의 땅] 당선

-- 1978~2008년, 고려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

-- 현재, 고려대 명예 교수







날마다 설날




김이듬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 (2011)







• 시인ㆍ서점 대표 김이듬

--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 부산대 독문과 졸업ㆍ경상대 대학원 국문학 박사

-- 2001년, 계간지 [포에지]에

詩 <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 발표 / 등단

-- 현재, 서점 [책방이듬] 운영


• 시집으로,

-- [별 모양의 얼룩] (2005),

-- [명랑하라 팜 파탈] (2007),

-- [말할 수 없는 애인] (2011),

-- [베를린, 달렘의 노래] (2013),

-- [히스테리아] (2014),

-- [표류하는 흑발] (2017) 발간



[ 아침 시단 ]


• 김이듬 <날마다 설날>


• 경북일보 2020.01.22



낯선 날인 설날에

무수한 계획을 세우지만,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사흘도 못 간다.


그대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니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사흘 못 가서 그대를 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술, 담배를 끊고

운동하겠노라고 다짐하지만

금세 무너지고, 설날처럼

계획을 변경하고 다시 쓴다.


탕왕(湯王)이 욕조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새기듯,

뜻하는 바를 마음속에 새기지만

늘 이성과 몸은 따로 논다.


날마다 설날이거나,

아니 평생이 설날이거나

좀 더 나아지려는 간절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손창기

시인



[ 경향시선 - 미래에서 온 詩 ]


• 김이듬 <날마다 설날>


• 경향신문 2014.02.02



언제부터 ‘계획’이라는 말이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약속을 뜻했을까.


흔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곳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만 같은 최대치와

이곳을 변화시키고 싶은 최소치 사이에서

그저 두리번거려 보는 것이다.


때문에 늘

현실에서 도약하고 싶지만

거대한 다짐들을 모두 감당하기에

그 끝은 허무로 기울어져 있다.


또 현실을 절충하면서

처음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이 시에서 다짐은

어쩌면 건강해지려는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겠다는 말은 역으로,

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고백이고,

권태를 이겨내고 싶다는 외침으로 들린다.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 또한 그렇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걸어봤다는,

그래서 또 그만큼

지금이 누추하다는 말이 아닐까.


그러니 그런 실패밖에

할 수 없는 다짐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다짐하고, 또 실패하고 그렇게

실패의 일대기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공약을

매일매일 적어 나가야 한다니!


그에게 하루는 ‘날마다 설날’이어서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

이미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슬픔 속에 있다.


내일이 다시 우리를 매혹시키기를.



/박성준

시인ㆍ문학평론가



[ 황인숙의 행복한 詩 읽기 ]


• 김이듬 <날마다 설날>


• 동아일보 2013.06.12



벌써 유월도 중순에 접어든다.


이럴 수가ᆢ


설날이 엊그제 같은데,

또 금방 내년이 되겠지!


여섯 달 가까이,

그 많은 시간을 뭐 하고 지냈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지나가고, 그렇게 지나가는

시간의 길이는 순식간이고.


그래서 나같이 어영부영

사는 사람은 항시 시간이 없다고,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초조한데,

충실히 사는 사람들은 느긋한 것이다.


그들은 세월이 빠르다는 한탄을 덜 한다.


그들에게는 더 긴 시간이 주어졌기에.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낯설다’, 즉 새롭다는 뜻의 ‘설’ 아닐까

화자는 짐작한다.


쉽사리 사랑에 빠지고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운동은 통 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새해부터는 싹 바뀌어 보리라,

설날을 기해 화자는 마음을 다잡았는데,

사흘이 못 간다.


만취한 채 잠들었던

낯선 방에서 깨어난 화자,

어찌나 자신이 한심하던지

눈물도 나지 않는다.


아, 환멸이야!


그러나 이내 화자는

자기의 ‘뜻한 바’에 혀 한 번 쏙 내밀고,

씩씩하게 생각을 고쳐먹는다.


새해 결심이라는 게 뭐냐?


작심삼일이었다고

한 해를 다 망친 듯 속상해 하지 말자.


일신우일신!


날마다 새로운 날, 날마다 설날!


어쨌거나,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런 감정의 불모 상태,

나한텐 너무 어려워.


무리하지 말자.


결심을 새로 해야지.


나답게 살자, 생긴 대로 살자!


재밌고 개성 넘치는 시다.


화자의 주문을 따라 되뇌고

힘을 내볼까.


일신우일신!


새롭게 또 새롭게,

날마다 새로이 태어나세!



/황인숙

시인







나룻목의 설날




서정주





바다는


얼지도 늙지도 않는


울 너머 누님 손처럼


오늘도 또 뻗쳐 들어와서,




동지 보리 자라는


포구 나룻목.




두 달 전의 종달새


석 달 뒤의 진달래 불러


보조석공 아이는


돌막을 빻고




배 팔아 도야지를 기르던 사공


나그네의 성화에 또 불려 나와


쇠코잠방이로


설날 나그네를 업어 건넨다.




십 원이 있느냐고


인제는 더 묻지도 않고


나그네 배때기에


등줄기 뜨시하여


이 시린 물 또 한 번 업어 건넨다.





-- 전집 [미당 서정주 전집 1 : 시 ] (2015)







• 시인ㆍ대학 교수 서정주 (徐廷柱ㆍ1915~2000)

-- 호ㆍ미당(未堂), 전북 고창 출생

-- 1935년, 동국대학교 졸업

--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詩 부문에

詩 <벽> 당선 / 문단 등단

-- 1936년, 김광균ㆍ오장환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 창간 및 주임 역임


• 시집으로,

-- [화사집] (1941),

-- [귀촉도] (1948),

-- [서정주 시선] (1956),

-- [신라초] (1961),

-- [동천] (1968),

-- [질마재 신화] (1975),

-- [떠돌이의 시] (1976),

-- [서으로 가는 달처럼...] (1980),

--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 [안 잊히는 일들] (1983),

-- [노래] (1984),

-- [팔할이 바람] (1988),

-- [산시(山詩)] (1991),

--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 [80소년 떠돌이의 시] (1997) 발간



[ 詩가 있는 아침 ]


• 서정주 <나룻목의 설날>


• 중앙일보 2012.05.15



바다에 연한

외진 나루터 풍경이

설인데도 고즈넉하다.


변함없이 밀물이 들고,

겨울보리는 파릇파릇하고,

돌 쪼던 아이는 흥얼대며

그냥 돌을 쫀다.


하지만 강 건너에

고향이 있는데

찾을 이가 없겠나.


물이 있는데

건너는 사람이 없겠나.


'운송업'에서

'축산업'으로 전환한

마음 약한 어제의 사공이,

제 천직(天職)을 저버리지 못하고,

반바지 차림으로 또 찬물에

발을 적신다.


미당 중기의,

눈에 잘 안 띄는 작품이다.


시인은

영욕의 세월을 살다 갔으나,

그의 시는 남아서 이렇게 의젓하다.


한 번 더 읽어 드리고 싶은 대목,

"나그네 배때기에/

등줄기 뜨시하여/

이 시린 물 또 한 번 업어 건넨다"


좋다.


어디에도 꿰맨 자국이 없는데,

참 좋다.



/이영광

시인



[ 아침 시단 ]


• 서정주 <나룻목의 설날>


• 경북일보 2018.12.30



바다는 마음속 누님의

부르튼 손처럼 뻗쳐 들어오고,

동지(冬至) 보리가 자라는

나룻목의 풍경은 정겹습니다.


이런 비유는

그윽하여 너무 좋습니다.


두 달 뒤의 종달새 소리와

석 달 뒤의 진달래 향기를 불러 모아

아이는 돌을 쪼아댑니다.


시간을 끌어당기는

아이의 어깨와 엉덩이는

흥겨울 것입니다.


손님이 적어

돼지를 키우는 사공은

짧은 바지를 입고,

고향을 찾아가는 나그네를

배로 건네줍니다.


삯도 묻지도 않고

시린 강물을 업고 건네는

사공의 등줄기는 오히려 뜨듯합니다.


새해 내내 설날의 인정이

훈훈하게 이어지길 빌어 봅니다.



/손창기

시인







어머니와 설날




김종해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 시집 [어머니, 우리 어머니] (2005)







• 시인ㆍ출판인 김종해

-- 1941년, 부산 출생

-- 1962년, 국학대학 국문과 졸업

--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詩 <저녁> 당선

--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詩 부문에

詩 <내란(內亂)> 당선 / 등단

-- 《현대시》, 《신년대》 동인 활동

-- 1979년~ , [문학세계사] 대표


• 시집으로,

-- 첫시집 [인간의 악기] (1966) 이후 최근에 발간한

[늦저녁의 버스킹] (2019)에 이르기까지 총 12권의

시집을 상재하였슴.



[ 詩가 있는 아침 ]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 중앙일보 2000.02.07



아들의 설빔을 지어주느라

어머니는 섣달 그믐밤을

꼬박 새우셨다.


이불 속에서 몇 밤 남았는가

손을 꼽으며 기다려온 설날은

나이가 들어서도 오히려

더 아름다운 '어머니의 나라' 가 된다.


김종해는 이렇게 설날이면

하늘까지 달래서 눈을 내려주고

천만명이 민족 대이동을 하는

고속도로를 넘지 않고도 우리들을

고향으로, 어머니 곁으로 데려다 준다.


포르릉 포르릉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구덕산 둥지로 세배가는

애기까치의 꿈이 눈발 속에 곱다.



/이근배

시인



[ 아침 시단 ]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 경북일보 2019.01.31



설날에

새뱃돈은 받을 수 없었지만

어머니가 계셨기에 행복했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어머니의 손길을 거치면

모든 걸 빚을 수 있었습니다.


눈 오는 소리로 흰떡을,

산을 불러 산나물을,

바다를 불러 생선을 빚는 설날은

어머니의 공화국이자 영토였습니다.


하여 따듯한 정이 넘쳐났고,

나의 꿈과 희망이 달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길을 집으로 데려와서

검정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콧물 묻은 소매를 걷어서

설빔을 내어 주신 어머니!


아직 우리의 영혼은 늙지 않는데,

설날에 그리운 선물은 다시 받을 수 없나요.



/손창기

시인


• 박현웅 作, <외갓집 가는 길>, 2019년 作,

나무에 아크릴, 50 x 31.5 cm



[ 그림 에세이 ]


• 분홍빛 꽃 만발한 설날 <외갓집 추억>


• 문화일보 2020.01.21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윤극영 선생의 동요

<설날> 가사 가운데, 4절이 참 재미있다.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그렇게 엄하시던 아버지가

신기하게도 이날만큼은 인자해지신다.


어디 그뿐인가.


배불리 먹고, 놀고, 주머니도 두둑해지고ᆢ



아이들이 설렘으로 기다리는 그믐날이

‘까치설날’이다.


길조와도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작다’는 의미가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서해안 지방에서 ‘작다’는 의미로

‘까치’ 혹은 ‘아치’라 불렀단다.


하루라도 더 행복한 설날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기쁜 설날에 외갓집이 빠질 수 없다.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시던

외할머니의 사랑이 그리운 곳이다.


박현웅의 목판 화폭은

이런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외갓집의 추억이 얼마나 좋았으면

분홍빛 꽃들이 만발해 있을까.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은 또 어떤가.


매일이 설날 같고,

발 딛는 곳마다 외가 같기를ᆢ



/이재언

미술평론가


• Martin Czerny - Pensive


※ NAVER,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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